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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해 기소된 A씨 재판 증거 목록엔 그가 진 빚의 굴레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서른 살 청년은 가게를 차리려다 제2금융권에서 비싼 이자를 내고 대출을 받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손을 벌렸다. 하지만 경기침체 여파로 가게 운영이 시원치 않아지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마흔줄에 접어들면서 그는 ‘갭투자’를 해보겠다며 대출을 더 받아봤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부채는 계속해서 쌓여갔고 매달 내는 이자가 가게 수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자 일수까지 손을 댔다. 이자를 내기 위해 사채를 끌어다가 돌려막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막다른 곳에 몰린 그는 더 깊은 대출의 늪으로 빠졌다. 다시 지인 명의로 대출을 받고 사채와 신용대출도 늘렸다. 이렇게 진 빚이 8억원이다.

독촉이 이어지면서 가게 문을 닫았다. 주변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외향적이었던 그가 이때쯤 ‘이제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독촉이 극단적 선택의 트리거(방아쇠)로 작용한 셈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알게 되면 가게 운영은 못하게 될 거야. 사채업자들한테 설명을 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아.” 그는 아내에게 설명한 뒤 죽음을 생각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더 불행할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빚의 늪, 독촉의 방아쇠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일반 자살 사건에 비해 중첩된 경제적 문제가 사태를 촉발한 비율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국민일보가 9일 집계한 2009년 이후 발생한 사건 191건 중 생활고 및 빈곤, 채무, 사업 실패 등 경제적 영역의 문제가 가해자의 스트레스 요인으로 확인된 사건은 97건(50.7%)에 달한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일반 자살자의 동기로 정신적·정신과적 문제(31.7%)가 가장 컸다.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 가해자는 가장인 경우가 많다. 채무와 빚 독촉, 그리고 절망이 대물림될 것이라는 우려에 부모는 살인자로 돌변했다. 이들이 여러 이유로 빚의 늪에 빠지고, 이후 독촉이 시작돼 자신의 처지가 알려지기 시작하면 극단의 선택을 생각하는 식의 경로가 여러 사례에서 관측됐다.

A씨뿐 아니라 대다수의 살해 후 자살 사건 피의자들은 ‘아이를 남겨두고 갈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들의 변명에는 경제적 압박과 채무, 궁핍의 고통이 자녀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빚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거나 파산·회생 등 제도적 지원을 알고 있으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충격으로 고립되거나 사인 간 채무를 진 경우였다.

살해 후 자살 시도로 재판에 넘겨진 B씨 사건에도 독촉의 자국이 남아 있다. 운영하던 회사는 2016년 적자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회사 운영자금과 생활비가 부족해지자 은행과 사채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 경기침체로 회생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하루 50통 넘게 ‘빚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와 문자가 쏟아졌을 무렵 그는 가족을 모두 죽이고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찾은 곳은 회사였다. 대출 관련 서류를 폐기하기 위해서였다. 극단적 선택을 결정한 이후에도 빚의 흔적을 지우는 데 골몰했던 것이다.

절망의 대물림

전문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가족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경로에 주목했다. 사업 실패나 채무 증가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립되면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신에 빠진다. 이때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게 되고, 혼자 남겨질 자녀는 절망만 물려받는다는 착각에 빠져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씨 사건에서도 비극의 경로가 관측된다. 남편은 월급 중 100만원가량을 전처에게 위자료로 보내고 남은 150만원을 생활비로 가져다 줬다. 두 아이를 키우기엔 턱없이 적었다. 남편의 수입이 있어 저소득층 지원도 받지 못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보니 휴대전화 소액결제를 하는 일이 늘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을 때 제3금융권을 찾았다. 생활비를 위해 빌리기 시작한 채무는 곧 수천만원까지 몸집을 불렸다. 우울증이 깊어졌고, 세상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던 어느 날 아침 그는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떠나기로 했다.

안동현 한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회가 남겨진 아이들을 적절하게 돌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며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부모가 죽으면 아이도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가장의 경우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지게 될 위험이 더 크다는 의견도 있다. 김정진 나사렛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도 “급작스러운 실직, 사업 실패, 빚 등으로 사회적 지위가 변동되고 감당이 안 된다고 느끼는 경우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여기에 가부장적 사고가 더해지면서 자녀까지 데려가려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모가 고립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를 막아주고 도와줄 사회적 자본의 확대 등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지 말고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조언이다. 개인회생·파산 등 법적 구제책 이용을 부끄러워하는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은 “자살예방법 3조에 따라 모든 국민은 본인이 자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하면 국가나 지자체에 구조 요청을 할 권리가 있다”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주언 김판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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