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13) 교인들의 눈물과 땀방울로 건축한 충신교회

건축 중단돼 흉물된 교회 둘러보며 사택 전세보증금 빼 건축헌금 다짐

충신교회 교인들이 1976년 교회 건축 현장에서 일손을 돕고 있다.

목포의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용산역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충신교회의 상황이 어렵다는 걸 알고 가는 길이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컸다. 그곳에도 그리운 교인들이 있어서다. 건축이 중단됐다니 당장 해야 할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솔직히 놀랐다. 절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만 따라 서울행을 결정한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했다. 충신교회 교인 두 명이 역에 나와 있는 게 아닌가. 꽃길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차가울 줄이야.

역에서 동부이촌동(이촌1동)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유명한 부촌이 됐지만 1976년에는 형편없었다. 한강맨션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판자촌도 군데군데 있었다. 개발로 어수선하기까지 했다.

교회는 1층까지 공사가 진행되다 수년째 중단됐다. 흉물스러웠다. 동네 주민들이 교회를 보고 대체 뭐라 생각할까 두려웠다. 사택은 서부이촌동(이촌2동)의 한 아파트에 있었다. 연탄보일러가 있는 아파트는 좁고 어두컴컴했다. 마당이 있고 널찍했던 목포의 사택이 잠시 생각났다.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에 더욱 미안해졌다. 건축이 중단된 교회를 둘러봤다. 보면 볼수록 빨리 건축을 마무리 짓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사택 전세보증금을 빼 건축헌금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충신교회에 부임한 첫날이었다.

차마 아내에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길뿐이었다. 내가 희생해야 교인들에게도 건축헌금을 독려할 수 있었다. 나는 짓다 만 교회 구석에 합판으로 벽을 세워 생활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계획이 선 뒤 장로님들과 상의했다. 장로님들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담임목사가 부임하자마자 사택을 포기하는 게 무척 미안했다고 한다. 교회가 결정했으니 가족에게 이실직고해야 했다.

면목이 없었다. 갈월동 판잣집에서 신혼 생활하던 때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충신교회의 지금 본당이 당시 건축한 예배당이다. 그때도 화장실이 교회 마당에 있었다. 교회 구석 간이 사택에서 지낼 때는 화장실이 늘 문제였다.

“아빠, 화장실 가고 싶어요.” 막 잠이 들었는데 아이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간 아이를 기다리던 밤이 이어졌다. “아빠, 어디 가면 안 돼. 앞에 있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나는 젊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지금이야 웃으며 추억하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았다.

손에 쥔 게 없는데 교회 건축을 재개하니 어려운 게 이만저만 아니었다. 나부터 건설현장에 나갔다. 교인들도 하나둘 힘을 보탰다. 권사님들도 벽돌을 날랐다. 눈물로 지은 예배당이다. 그러니 이 좁은 예배당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몇 차례 교회를 이전하자는 말도 나왔지만,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도 동부이촌동 초입에서 주민들을 맞이한다. 교회 구석구석에는 교인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 있다. 교회 건축이 마무리됐으니 예배당을 채워야 했다. 나는 전도에 모든 걸 걸고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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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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