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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배병우] 대의정치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선거와 시민 대표 총의에 의한 국가 운영은 현대 사회의 표준
여권의 직접 민주주의와 동원 정치는 이런 기본 질서 부정
조국 사태, 보수-진보 문제로 보는 건 핵심을 놓친 것
민주주의 잠식의 문제로 봐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왜 추락했나. 많은 사람이 ‘최순실 게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존재와 국정 개입이 탄핵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맞는다. 근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불행은 국정 운영 방식에서 비롯됐다. 적극적 지지층만 바라보는 분열의 정치, 국회와 정당을 허울뿐인 존재로 만든 국민 동원의 정치가 문제였다. 그는 5선 국회의원 출신이고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까지 지냈다. 그렇지만 의회민주주의나 대의정치에 대한 기본 인식이 없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의회와 정당은 파당적 이익을 앞세우는 사악한 정치집단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2016년 1월 시작된 ‘민생 구하기 입법 촉구 천만인 서명운동’이다. 정부와 여당이 제출한 민생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거리로 나서 국민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 전해 10월에는 어버이연합 등 190여 개 보수 단체가 ‘국회개혁범국민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국민에 의한 국회 해산제, 의원 불체포·면책특권 폐지, 의원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적용, 국회의원 정원 감축 등을 주장했다. 직접 민주주의를 내세워 의회와 정당정치 부정으로 나아갔다.

촛불항쟁에 힘입어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가. 문 대통령은 야당 의원 시절 박 전 대통령의 국민 서명운동을 “관제 데모”라고 비판하는 등 분명히 대의민주주의자였다. 대통령 후보 때도 의회 및 야당과 협치하는 대통령, 집권당이 책임 정치의 보루가 되는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공약했다. 집권하자마자 표변했다. 2017년 8월 취임 100일 대국민보고대회에서 문 대통령은 “간접 민주주의를 한 결과 우리 정치가 이렇게 낙오됐다”면서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는 정치를 ‘간접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민주주의론 권위자인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지난해 출간된 ‘청와대 정부’에서 이를 꼼꼼히 분석했다. 정당과 의회, 내각이 아닌 청와대 중심의 국정 운영, 국민과 지지자를 동원하는 정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박근혜정부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많은 국민들은 지난 7일 문 대통령의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발언을 듣고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 문 대통령은 ‘조국 수호’ ‘조국 파면’으로 나뉘어 나라가 두 쪽이 났는데도 이를 국론 분열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또 ‘나뉘어진 광장의 정치’를 직접 민주주의의 표출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 그리고 이에 쌍둥이처럼 따라붙는 국민 동원의 정치는 매우 위험하다. 우선, 직접 민주주의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직접 민주주의의 핵심은 공직을 시민들이 번갈아 맡는 것인데 지금처럼 인구가 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국민청원 국민소환 등도 전면적으로 도입될 경우 목소리 큰 개인이나 집단의 영향력을 더 키우고 사회 분열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직접 민주주의와 동원의 정치가 판치는 곳에 민주주의 기본 질서는 무너진다.

현대 민주주의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으며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와 다른 작동 원리를 일궈냈다. 그리고 수백 년 역사의 시험을 견뎌냈다. 그것은 대의제로, 선거를 통해 시민들의 대표를 뽑고 이들 시민 대표들의 총의에 의해 입법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시스템이다. 정견을 달리하는 시민들이 정당을 만들어 다원적으로 경쟁하는 것도 한 부분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정치체제를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

하버드대의 정치학자 두 명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는 지난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두 저자는 과거처럼 군사독재나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급진적 방법에 의해 민주주의가 훼손되기보다는, 합법적 절차로 당선된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 상황이 더 심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정부와 문재인정부가 강조하는 직접 민주주의는 이 책에 서술된 ‘합법적으로 선출된 통치자에 의한 민주주의 잠식’에 가깝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SNS를 통해 직접적인 지지자 동원에 나섰고, 유럽 극우세력도 대의민주주의를 공격하며 직접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포퓰리즘이나 신권위주의 정치세력의 행태와 박근혜·문재인정부의 통치 방식이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조국 사태를 진보와 보수의 싸움으로 보는 건 핵심을 놓친 것이다. 사회의 공공재이자 기본 질서인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의 문제로 봐야 한다.

조국 사태로 본격화된 대의정치 폄훼와 동원 정치의 후폭풍은 이미 심각하다. 가족 간, 친구 사이도 찢겼다. 서로 믿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권이 이런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아니 무리수 덕분에 단기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한국 사회에 남긴 상흔은 깊고 오래갈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정부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매우 혹독할 것이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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