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인 쿠르드를 외면하고 터키의 공격을 사실상 묵인한 도널드 트럼프(사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본심을 드러냈다. 쿠르드족의 일은 쿠르드족의 일일 뿐이며 미국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백악관이 시리아 주둔 미군의 철수를 선언한 지 사흘 만에 터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고 “터키가 시리아를 침략했다. 미국은 공격을 지지하지 않으며 터키 측에 군사행동은 나쁜 생각임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터키군이 쿠르드족을 말살시킬 가능성을 우려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터키의 경제를 싹 쓸어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 철수 결정을 옹호하기 위해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우리를 돕지 않았다”는 궤변을 꺼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은 그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라며 “이는 (2차 대전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이슬람국가(IS)를 몰아내야 한다는 쿠르드족의 목표와 IS 격퇴를 바라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함께 전쟁을 치렀을 뿐 유럽에서 벌어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의 사례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의 군사작전 탓에 억류돼 있던 IS 무장대원들이 탈출할 수 있다’는 지적에도 “그들은 유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터키는 민간인과 기독교인을 포함한 종교적 소수자를 보호하고, 인도주의적 위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시리아 북동부 도시 라스알아인에서 9일(현지시간) 터키군의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터키군은 이날 쿠르드족이 통제하는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 공습과 폭격을 가하고 지상군을 투입했다. AFP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민간인을 포함한 쿠르드족의 인명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인 시리아인권관측소는 터키군 공격으로 쿠르드 전투부대인 시리아민주군(SDF) 대원 11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8명 나왔다고 밝혔다. 또 공격 측에서는 6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으나 이들이 터키 정규군 소속인지, 친터키 시리아 반군인지는 불분명하다. 레지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터키군이 ‘테러리스트’ 109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실인지 여부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돈을 동맹보다 중시하는 트럼프 외교노선이 사실상 전쟁의 원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친정인 공화당마저 들고 일어섰다.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아군 진영 내에서도 새로운 전선을 만들고 있는 모양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공화당 매파와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분노케 했다”며 “트럼프는 이제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됐다”고 전했다.

터키군의 공격 개시 직후 라스알아인에서 트럭을 타고 피난길에 오른 쿠르드족 주민들의 모습.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번 결정은) 트럼프 임기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당과 손잡고 터키에 대한 초강력 제재 법안을 추진하겠다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공화당 서열 3위 리즈 체니 하원의원도 “미국은 동맹 쿠르드를 버렸다”며 “미군 철수를 결정한 것은 역겹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노선이 내년 대선 쟁점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P통신은 “트럼프 행정부의 예측 불가한 외교정책에 환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미국 우선주의’가 실제로는 ‘미국 나홀로’를 뜻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이형민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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