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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박종순 (14) 아파트 문패에 손 얹고 “충신교회 교인 되게…”

교회 주변에 하나둘 아파트 들어서면서 직접 가정 방문해 전도대상자들 만나

박종순 목사(가운데)가 1976년 9월 교회 건축을 마무리 하기 위한 건축 기공식에서 기도하고 있다.

충신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 건축을 마무리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교회에 부임한 걸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노회 어른들이 하나같이 혀를 찼다. “박 목사, 축하해 줘야 하는데 너무 힘든 교회라 걱정이네. 목포에 있지 그랬어.”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낙담하지 않았다. 목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물러서지 않겠다. 선택한 길이니 스스로 포기할 수도 없다. 선택자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교회에 활력이 필요했다. 기도운동이 출발이었다. 새벽기도에 방점을 찍었다. 수요기도회와 금요 철야도 활성화했다. 부임 후 10년 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사택도 교회 안에 있었다. 교회가 기도의 집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설교하고 또 설교했다. 설교가 끝나면 바로 다음 설교를 준비하는 게 일상이었다. 수시로 전도대와 함께 동부이촌동을 누볐다. 마침 지역에 하나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황금어장이었다. 1970~80년대 전도는 대면전도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전도대상자들을 만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을 방문해야 했다. 환영해 주는 집도 있었지만 문전박대하는 곳도 많았다. 내가 오뚜기 아닌가. 밀어내면 다시 일어나 그 집을 찾았다. 당시에는 아파트에도 집마다 문패가 있었다. 어느 집을 방문하더라도 문패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주님, 이 집 문에 충신교회 교패를 붙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가정, 저희 교인 되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 일로 바빠 운동할 시간도 없었다. 전도가 운동이었다. 승강기도 없던 아파트를 수시로 올랐다. 동부이촌동 서쪽 끝에 있던 교회에서 반대편 끝에 있던 금강아산병원까지의 거리가 2㎞쯤 된다. 이 길이 조깅 코스였던 셈이었다.

교회 로비에는 전도 현황판을 만들어 걸었다. 어떤 교인이 몇 명 전도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표였다. 전도왕 시상식도 수시로 했다. 메달도 수여했다. 모든 교인이 온 힘을 다해 전도했다. 자연스럽게 교인이 늘었다.

충신교회에 온 지 얼마 안 돼 구청이 길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손목 굵기의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언제 자라나 했는데 지금은 아름드리나무가 됐다. 교회도 그렇게 성장했다. 나약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든든한 교회로 성장했다.

부임 초장기, 교인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전도와 함께 회복 목회에 방점을 찍었다. 마음의 상처는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수 없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치료해야 한다. 내과적 접근이 필요했다. 좋은 약을 투약하고 보식을 해야 했다. 그 길을 택했다.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었다. 늘 긍정적으로 목회했다. 설교에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지난 세월에 얽매이지 말라고 권했다. 비전을 품고 작은 걸음을 내딛자고 했다. 예언서 대신 바울서신을 택해 설교했다. 비전을 심기 위해서였다. 80년대 중반이 지나자 경직돼 있던 교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교인들이 따뜻해졌다.

위로의 말이 넘쳐났다. 새신자들도 늘었다. 스스로 문턱을 넘는 교인들도 많았다. 고난과 인내를 겪은 이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일까. 교인들의 수고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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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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