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2년 이탈리아 빈치라는 마을에 그림을 그리는 소년 레니가 살았다. 그가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 스승은 달걀을 반복해서 그리게 했다. 레니는 같은 것만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고, 훗날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반복을 통해 레니에게 스승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림의 대상을 관찰하는 법이었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각도와 빛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그림의 아주 기본적인 부분을 익히게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많은 역작들의 바탕에는 이처럼 단단한 뿌리가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출 견인차 역할을 하는 반도체산업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일본이 우리에게 공급하는 핵심 소재·부품 수출을 규제한 탓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1위와 2위 기업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품 생산에 필요한 일부 핵심 소재의 대외 의존도가 90%에 달할 만큼 우리 반도체산업의 뿌리가 생각보다 취약했다는 것을 일본의 수출 규제가 다시금 일깨워줬다.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또한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보여줬던 우리 국민은 위기를 도약의 전기로 활용하는 의지와 능력이 충분하다. 일본의 수출 규제 선언 이후 10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민간과 정부가 함께 협력해 발 빠르게 대응해오고 있다. 기업들은 자체 연구·개발(R&D)부터 수입처 다변화까지 소재·부품·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정부 또한 지난 8월 28일, 핵심 소재·부품·장비 자립화를 위한 예산 지원을 대폭 늘리고 신속하고 유연한 R&D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춘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 대책’을 발표하고 즉각적인 후속 조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금 더 크고 넓은 시야에서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소재·부품·장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전체 R&D에 있어 근본적인 혁신을 모색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R&D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지고, 그 기술은 산업의 경쟁력과 국력의 바탕이 된다. 미국 일본 독일 등 경제 선진국에서 보듯 국가 주력 산업의 뿌리에는 탄탄한 R&D를 통해 확보한 기술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R&D 투자 규모는 선진국 수준이지만 그동안 핵심 원천기술보다는 응용기술 개발에 치중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우리나라 R&D가 선진국 추격자(fast follower)가 아닌 세계 선도자(first mover)로 전환돼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R&D 수행의 모든 단계에서 연구자 중심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적절한 경쟁과 보상이 확립되도록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한 소수의 연구자들이 독점하던 R&D에 대한 기획을 개방형으로 전환해 많은 연구자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다양하게 제안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성공에 안주하는 쉬운 연구에서 벗어나 실패 가능성이 있더라도 사회·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큰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연구 중심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연구 성과에 대해서도 전문성을 제대로 갖춘 해당 분야 전문가 그룹이 공정하게 평가하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 또한 대학과 출연연은 자신들의 역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필요한 인력을 적시에 양성하고 기초·원천 연구 성과가 기업 현장에 제대로 이어달리기가 될 수 있도록 협업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연구자들 또한 스스로의 역할과 책임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연구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부 역시 막대한 R&D 예산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사업들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용비어천가’의 구절을 되새겨야 할 때다. 이번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 대책’이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당면 문제 해결과 함께 미래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모든 분야에 연구·개발이라는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뿌리 위에서 바람을 이겨내고 눈부신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오길 기대해본다.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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