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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의 문학스케치] 프리모 레비의 신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는 나치 광기보다 비참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유쾌하게 그려


언젠가 착하고 순진한 독자 한 명이 고맙게도 내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처럼 재미없는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쓰실 건가요? 힐난하는 말투가 아니었고 외려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에둘러 묻지 않아 나 역시 에둘러 대답하지 않아도 되어서 고마웠다. 정직한 질문에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직함마저 부드럽게 요구하는 힘이 있어서 재미없는 소설을 왜 지금까지 써왔는지 과연 앞으로 계속해서 써도 되는지 자문하며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글쓰기 자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소통과 공감을 바란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테다. 어떤 글을 쓰든 글에 담긴 진심과 진실을 알아봐 주길 바란다면 글을 쓰는 이는 신뢰감을 줄 수 있고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를 하려 애써야 한다. 소설과 같은 허구의 장르는 허구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진실에 가까워야만 독자에게 공감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이런 이유로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반파시스트 유격대에 참여했다가 1943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 그는 수용소 경험과 풀려난 뒤 겪은 일들을 ‘이것이 인간인가’와 ‘휴전’에 그려놓았다. 왜 글을 써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유 역시 아무도 믿지 않을 일들을 기억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에 관한 증언을 비롯해 이를 모티프로 삼은 문학 작품과 영화 등이 이미 차고 넘칠 정도여서 그의 이력을 알고 그의 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안다면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나치의 광기와 인간성이 사라진 수용소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예상을 하며 그의 글을 읽는다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의 글은 이상하게 눈부시다. 예상했던 어둡고 참혹한 풍경은 저 멀리 뒤쪽으로 밀려나 있어 희미하기만 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태도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그에게 퍼부어진 흔한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당신의 글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증오와 원한과 복수심을 찾아볼 수 없는가였다. 이 질문에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객관적이고 절제되어 있어야만 정당한 증언으로 읽힐 수 있으리라 여겨서였다고 답했다. 덧붙여서 학살자들을 용서한 적 없고 용서할 생각도 없노라며 범죄가 낱낱이 밝혀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학살과 학살자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단호한 태도에 비추어 보자면 그의 글은 그저 객관적이거나 절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냥하기까지 하다. 그의 단호한 태도와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글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 괴리감에 나 역시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의 글이 남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가 참혹하고 비참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유쾌하게 그려서인 듯했다. 만약 비참함을 강조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만을 강조했더라면 그의 글은 평범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은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학살의 끔찍함을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적이었고 인간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람들이 기어이 죽어야만 했던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처한 상황의 비인간성을 절감케 해주어서였다. 그는 나치의 잔혹성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했던 신념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그는 글에서 묘사한 낙관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위임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신념은 직접 언급된 경우보다 더 진지하고 분명하게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마침내 그의 고뇌가 독자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다시 말해 신념을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신념을 실현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작가가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그 신념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는 걸 가르쳐줬다.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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