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굳어 죽음 문턱까지 갔던 ‘오빠’가 남편으로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5>

홍예숙 서울 대망교회 사모가 1992년 부친 홍재식 목사가 개척한 경남 함양반석성결교회에서 안수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했다.

1989년 12월 부산 고신대에 입학원서를 넣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 한 가정을 심방하게 됐다. “꼭 가야 할 데가 있는데….” “어디요?” “참 아까운 아이 하나가 있는데 다 죽어 가고 있다. 너를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단다.”

그 시절 어머니가 남의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내게 대학을 포기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서 능력 있게 쓰시는데 새삼스레 무슨 공부를 하느냐는 게 어머니의 논리였다. “어찌 받은 은혜인데, 어찌 받은 능력인데….”

심방을 부탁하신 분의 안내에 따라 시장 한가운데 있는 집을 찾아갔다. 경남 함양에서 소문난 집이라고 했다. 아픈 아들은 서울대를 졸업한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만 낫게 해 준다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육체적으로 볼 때 도저히 나을 수 없어 보이는 중환자였다.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이미 다리는 오그라들어 있었다. 목과 척추, 어깨 그리고 팔까지 거의 굳어 있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환자를 보자 내 입에서 “예수 잘 믿으면 낫겠네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부모는 눈물을 흘렸다. “하룻밤 자 보고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연락 주시고 함양 반석성결교회로 오세요. 안수해 드리겠습니다.”

이튿날 평소와 같이 환자들을 안수해 주고 그다음 날 있을 크리스마스 전야예배를 준비하는데 연락이 왔다. 청년의 아버지였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루만 더 와 주세요.” 짜증이 났다. ‘다른 환자들은 다 자기들이 오는데 왜 그 집은 또 오라고 그래?’ 어머니를 원망했다. 어머니가 원칙을 똑바로 세우지 못해 일일이 환자 집에까지 가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덜거리며 그 집에 갔다. ‘어제보다 잘생겨졌네.’ 환자는 처음 볼 때보다 인상도 좋았고 깔끔했다. 얼굴에 웃음도 있었다. 첫날은 하얀 내복 차림에 뼈와 가죽밖에 없어 마치 에티오피아 노인 같았다. 그러나 둘째 날은 목 티도 입고 있었고, 하얀 체육복 바지도 입고 있어 얼굴만 보지 않으면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다만 얼굴은 눈만 퀭해서 살아 있는 해골 같았다.

바로 다음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주일이었다. 모두가 예배로 바빴다. 그런데 한 가족의 등장으로 교회는 난리가 났다. 그 청년이 아버지의 등에 업혀 온 것이다.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왔다. 교인들이 자리를 마련해 주며 반갑게 맞아줬다. 청년은 의자에 똑바로 앉지 못하고 비스듬히 앉았다. 통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린 후 안수기도를 했다. 교회 성도들의 90%가 환자였기 때문에 안수기도는 빠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종합병원 중환자실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환자가 그 청년이었다. 마침내 문제의 청년이 안수기도를 받을 차례가 됐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는 동안 굳었던 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오그라들었던 다리가 쭉 펴졌다. 비틀거렸지만 혼자 일어나 걸었다. 온 교회가 함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청년의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청년은 신앙생활 잘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그 가정은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복된 가정이 됐다.

그 집이 함양에서 유명했던 것은 아들 둘이 나란히 서울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그것도 형제가 나란히 서울대에 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그 집은 형제가 각각 국문학과와 국사학과에 나란히 들어갔으니 수재 집안으로 소문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읍내 사람들도 주목했다. 저 집 아들이 나으면 예수 믿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청년은 점점 나아졌다. 나중에는 청년회 회장으로,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됐다. 청년의 등장으로 연세가 있으신 아버지의 목회는 훨씬 생동감이 넘쳤다. 청년은 잠시 집에 가서 잠자고 오는 일 외에는 반석성결교회에 살다시피 했다. 점심도, 저녁도 사택에서 먹었다. 점점 청년과 학생이 많아졌다. 교인 숫자도 늘었다. 비록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청년은 맡겨진 일들을 훌륭하게 감당했다.

그러는 사이 고신대 합격통지서가 왔다. 부모님은 나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셨다. 그런데 아들을 둘씩이나 서울대에 보낸 그 청년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내 편이 되어주셨다. 내게는 수호천사와 같으셨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환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안수받으면 됐는데, 그렇지 않은 환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그 청년이었다. 주일 사역을 마치고 부산에 가서 공부하고 금요일에 함양에 돌아오면 얼굴이 좋지 않았다. 몸이 많이 아팠다. 당시 나는 그 청년을 ‘오빠’라고 불렀다. 그 청년이 내게 안수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었다. 하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보다 나이가 2살 어리니까 너 동생 해. 나 오빠 할게.”

교회에선 안수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다들 나를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기가 차서 웃었다. 교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런데 그 웃음을 허락으로 생각한 청년은 그때부터 나를 “예숙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몰랐던 ‘오빠’가 생겨버린 것이다. 안수 몇 번 받고 오빠와 동생이라니…. 그렇게 지금 남편인 오창균 목사와 인연이 시작됐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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