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지하철은 낡았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져 150년을 넘긴 지하철이다 보니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안 되고 터널로 들어가면 와이파이는 언감생심, 전화나 문자도 불가능하다. 영국 지하철에는 유명한 안내 방송이 있다. “마인드 더 갭(Mind the gap).”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간극·차이(gap)를 조심하라(mind)’는 뜻이다. 터널이 휘어진 곳이 많으니 방송을 들을 일도 잦다.

우리 지하철의 ‘이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발 빠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긴 안내문을 3음절로 간단하게 표현한 언어의 차이가 재미있다. 이 안내문은 열쇠고리나 티셔츠 같은 관광 기념품에 등장할 만큼 영국을 대표하는 문구가 됐고, ‘서로의 차이에 주의하라’, ‘간극을 메워라’는 등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씨에서 열리고 있는 ‘아무튼, 젊음’전에 미국 작가 존 바이런의 영상작품 ‘마인드 더 갭’이 나왔다. 조깅을 하는 노인과 청년이 있다. 몇 번 스쳐 지나가며 서로를 의식하다가, 노인이 청년 뒤로 다가가 말을 건다. “달리기에 참 좋은 날씨죠?” 청년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한다. 노인이 돌아선다.

이내 이어폰을 정리한 청년이 노인의 뒤에서 대화를 시도한다. “매일 여기 오세요?” 보청기를 빼놓은 노인은 그 말을 듣지 못한다. 청년이 돌아선다. ‘괜히 말 붙였어. 저 나이 사람들은….’ 청년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노인이 받는다. ‘…다 똑같지.’ 이어폰과 보청기 사이의 틈새에 빠져 서로에 대한 편견이 굳어지는 세대 갈등을 경계하는 뜻이리라.

#‘갭마인더(Gapminder)’라는 재단이 있다. 세계 40개국에서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팩트풀니스’의 저자인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이 세운 곳이다. 이들은 각종 데이터와 통계가 교육 환경 에너지 인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람들은 대개 비합리적인 본능 때문에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고 오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느낌을 사실로 잘못 받아들이게 하는 10가지 본능을 설명한다. 그중 첫손에 꼽는 게 ‘간극 본능(Gap instinct)’이다. 세상을 두 개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이 있다고 상상하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다수가 중간에 존재하므로, 극단 비교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마인딩 더 갭(Minding the Gap)’이라는 영화도 있다. 지난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지난 8월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선보였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흑인 키어와 백인 잭, 동양인 빙 세 친구들을 통해 부모와 자녀, 인종과 계층, 꿈과 현실의 간극에 대해 말한다. 잭이 아빠가 되고 동거녀를 때리기 시작하면서, 세 친구는 각자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는다. “심리치료 같다”며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쏟아놓은 후 빙은 새아빠의 폭력에 자신을 방치했던 엄마와 화해하고, 키어는 처음으로 아빠의 묘지를 찾아가 묘비를 닦는다.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화해의 조건’. 틈이 벌어졌다고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화해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일 게다.

#두 달여를 끌어온 ‘조국 사태’에는 정의와 불의, 공정과 특권, 20대와 586의 세대 갈등, SNS상의 자아와 현실 속 자아 등 너무나 많은 간극이 망라돼 있다. 무엇보다 광화문과 서초동 사이에는 10㎞ 남짓한 물리적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건너기 힘든 깊고 넓은 균열이 생겼다. 한스 로슬링은 ‘간극 본능’이 차이를 연상하게 하지만 사실은 수렴하는 차이며, 갈등을 떠오르게 하지만 실은 합의에 이르는 갈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광화문과 서초동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을까. 이번 주말에도 광화문과 서초동, 여의도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권혜숙 문화부장 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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