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광야] 삶의 무대 광야, 다시 일어서 한 발 내디뎌라

광야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광야는 삶의 무대이며 훈련장이다. 사진은 스페인 산티아고 북쪽 순례길(El Camino del Norte). 국민일보DB

“마침내 나는 일어섰고 한 발 또 한 발을 내디뎌 걸었다.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 나는 걷고 걸어야만 한다. 두 손과 두 발로 땅 위를 내디뎠다.”(알베르토 자코메티)

인생을 살다 보면 상황은 다르지만 ‘광야의 시간’을 만날 때가 있다. 절망의 광야, 슬픔의 광야, 실패의 광야, 불안과 염려의 광야, 고통의 광야에 갇힐 때가 있다. 실직이나 사업 실패로 헤어날 수 없는 파국에 내몰리기도 하고 육체적인 질병으로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심정일 때도 있다.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생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광야가 인생의 무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일어나 우리는 걸어가야 한다.



광야에 던져짐

성경에서 말하는 ‘광야’는 지리적인 실재인 동시에 영적인 은유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창 37:22)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지므로 광야의 생활이 시작됐다는 의미이다. 요셉은 던져진 구덩이에서 죽음과 같은 공포를 경험했을 것이다. 요셉의 두 번째 구덩이는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 세 번째 구덩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한 감옥이었다. 요셉의 구덩이는 다름 아닌 세상과 차단된 곳,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광야였다.

사람들은 요셉이 역경을 딛고 애굽의 총리가 됐다는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보다 13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기도 응답이 없을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믿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창 39:21)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창 39:23)

전갈이 우글거리고 하늘 위에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 우리는 복을 구하지 말고 은혜를 구해야 한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를 지날 때는 황금보다 생수가 더 귀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우리가 광야를 건널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혼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는 물론 탄식소리와 울음소리도 들으신다. 내가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고 잊혔다고 생각된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다. 여전히 그분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 그분은 분명한 계획을 세워 놓고 계시고 그분의 시간표대로 아름답게 이뤄내신다.



광야를 건널 때

니콜라 푸생이 그린 ‘모세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함’.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긴 시간 동안 모세는 자신을 잊힌 존재로 여겼을 것 같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간. 자기 소명은 이젠 끝났다고 여겼을 것이다. 왜 40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을까.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 4:19)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출애굽 할 계획을 갖고 계셨다.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바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하나님의 타이밍’으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수 있는 광야전문가로 40년 동안 훈련하셨다.

13년 동안 사울을 피해 광야로 들어가 숨어다녔던 다윗은 어떠한가. 그에게 광야는 탄식의 광야였다. 하루하루 살려달라는 피 말리는 기도를 했다. 기도로 광야의 위협을 이겨냈다. 그의 기도는 탄식의 시가 됐다. 신비로운 것은 탄식 시가 찬양 시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한결같이 감사와 찬양으로 끝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1~2)

유진 피터슨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광야를 호락호락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야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곳은 참으로 경이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 자체는 무대에 불과하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광야에 있었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위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없애버리려고 기를 쓰는 사울은 오로지 다윗을 잡을 생각에 다윗을 쫓아 달려갔고 살인만을 생각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 달려가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기도를 하며,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 영광을 받아들이며, 한결같은 사랑과 ‘약속을 지키시는 진실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준비했다.”(‘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중)



침묵의 광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도 인생의 흉년이나 기근을 만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영적인 침체에 빠질 때가 있다. 이럴 때 광야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광야의 영성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그분하고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댈러스 웨슬리연합감리교회 이진희 목사는 ‘광야를 살다’에서 “아브라함에겐 기다림의 광야, 요셉에겐 침묵의 광야, 다윗에겐 탄식의 광야, 모세에겐 잊힘의 광야, 엘리야에겐 영적 침체의 광야 등이 있었다”며 “이들은 광야에 들어가게 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그 광야에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광야는 결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다. 광야는 훈련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0(無)이 되게 하려고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다. 광야에 들어가면 누구나 0이 된다.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나오게 하시고 0이 된 우리를 사용하신다.”(‘광야를 살다’ 중)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광야학교’ 출신들이다. 모세에게는 시내광야, 예수님에게는 유대광야, 다윗에게는 그가 10여년간 살았던 여러 광야가 있다. 현재의 삶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광야의 길을 걸어온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자. 우린 다시 일어나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끝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