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당국 “원인파악까지 몇달 걸려” 마리화나 환각 성분 주범인 듯
미세한 연기입자 폐 흡수율 높아 가슴통증·구토 나면 병원 가야
보건당국, 이달내 대책 내놓기로


미국에서 액상 전자담배 흡연에 의한 중증 폐질환 발생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미 전역에서 전자담배 관련 피해자가 1500명에 육박했고 사망자도 30명을 넘어섰다.

국내에도 최근 의심환자 1명이 처음 보고돼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닌 상황이 됐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액상 전자담배 사용 관련 대책 마련을 지시했고 보건당국은 이르면 이달 안에 추가 대책을 내놓을 방침이다. 일각에선 액상 전자담배 판매금지도 검토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CDC “독감과 겹치면 합병증” 우려

21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 15일(현지시간) 기준 액상 전자담배(E-cigarettes 혹은 Vaping) 흡연에 의한 폐손상 확진 및 의심자 수는 49개주(알라스카주 제외)에서 모두 1479명에 달했고 숨진 사람은 33명으로 집계됐다. 피해자 수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폐 손상자 1358명 분석 결과 70%가 남성이었다. 연령은 13세부터 75세까지 다양했다. 79%가 35세 이하 젊은층이었다.

미국 보건당국 중간조사 결과 현재로선 전자담배 액상에 마약인 마리화나의 환각 성분인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을 섞어 흡연한 게 폐손상의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3개월 전부터 액상 전자담배 사용이 확인된 849명을 살펴봤더니 약 78%가 THC 함유 제품을 피운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일부 주에선 마리화나 사용이 합법화돼 있다. 하지만 또 약 58%는 니코틴 함유제품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돼 THC가 아닌, 니코틴 혹은 다른 첨가물에 의한 문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자담배 액상에는 니코틴과 식품첨가물로 쓰이는 프로필렌글리콜 및 글리세린, 가향물질(과일맛을 내는 향료 등)이 함유돼 있다. 충전용 전자기기의 코일을 가열해 이 혼합용액을 기화시켜 나오는 연기(에어로졸)를 흡연하는 방식이다.

CDC는 명확한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액상 전자담배 사용 자제를 당부하고 특히 THC를 혼용하지 말라고 강력 권고했다. 또 전자담배 사용 관련 중증 폐질환을 ‘EVALI(E-cigarettes, Vaping Associated Lung Injury)’로 새롭게 정의하고 의료진 임상 진료지침을 만들어 공개했다.

의료진에게는 호흡기 및 소화기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액상 전자담배 사용 여부를 꼭 물어볼 것을 요청했다. 기침과 호흡곤란, 가슴통증, 메스꺼움, 구토, 설사, 전신 피로감, 열, 체중감소 등이 대표 증상이다.

CDC는 “지금 당장 직접적 인과관계를 단정지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시판 중인 제품의 액상에는 THC 외에도 비타민E아세테이트, 니코틴 등 다양한 물질이 들어 있다”면서 “어떠한 물질이나 원인에 의해 관련 이상 반응이 나타났는지 파악하려면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희의료원 호흡기내과 최혜숙 교수는 “동물실험 결과이긴 하지만 니코틴을 빼고 다른 액상과 가향물질을 섞어 흡입시켰을 때 혈관내피세포 손상이 확인됐다. 가향물질 중에선 특히 멘솔과 계피가 가장 나빴다”면서 “여기에 니코틴까지 더해진다면 악영향은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CDC는 특히 독감(인플루엔자)이나 겨울철 유행 호흡기질환과 맞물려 더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CDC 관계자는 “전자담배 사용자들에게 힘든 겨울이 될 것”이라며 “숨이 가쁘거나 메스꺼움, 구토 등 증상이 있을 경우 병원을 찾으라”고 권했다.

미국 정부는 아울러 모든 액상 전자담배의 판매 허가를 받기 위한 자료를 내년 5월까지 식품의약국(FDA)에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판매 허가 전까지 담배향을 제외한 가향 액상 전자담배는 판매 금지된다.

한국, 폐손상 관련 임시 ‘질병코드’ 신설

우리 보건복지부도 지난달 20일 액상 전자담배 사용 자제를 권고하고 나섰다. 당시엔 판매 금지 등의 조치는 담기지 않았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 임산부 및 비흡연자는 액상 전자담배를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일선 의료진은 환자 진료시 전자담배 사용과 폐손상의 연관성이 인정되는 경우 질병관리본부에 즉시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지난달 25일 통계청 고시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에 전자담배 사용 관련 폐손상에 대한 임시 ‘질병 코드’를 신설했다.

질본 관계자는 “미국 환자 사례 기준에 의하면 관련 증상 최초 발생 전 3개월간 액상 전자담배를 사용했으며 흉부X선 영상에서 이상이 발견되고 감염성 질환에 의한 것이 아닌 걸로 확인될 경우 ‘확진자(Confirmed)’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또 “액상 전자담배 사용자 중 기침, 호흡곤란, 가슴통증 등 호흡기 이상 증상이 있는 경우 즉시 의료기관을 방문해 보는게 좋다”고 강조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담배 규제 팩트시트’에 따르면 국내 액상 전자담배 흡연율은 2017년 기준 성인은 평균 2.7%(남성 4.4%, 여성 0.9%), 청소년(중1~고3)은 2018년 기준 평균 2.7%(남학생 4.1%, 여학생 1.1%)였다. 일반 궐련이나 궐련형 전자담배(아이코스 등)에 비하면 낮지만 성인과 청소년 모두 최근 액상 전자담배 흡연율이 상승 추세여서 우려를 낳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액상 전자담배에 대한 국내 규제가 매우 느슨하다는 점이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신종 액상 전자담배 제품들이 최근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현행 담배사업법은 연초의 잎을 원료로 쓴 것만 담배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연초의 줄기·뿌리에서 추출한 니코틴 혹은 화학물질로 합성한 니코틴을 사용한 액상 전자담배들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 이들 유사 전자담배에 어떤 화학물질이 어떤 방식으로 담겨 있는지 파악이 쉽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연 전문가는 “마라화나의 경우 국내에선 유통이 금지돼 있지만 최근 사회 고위층 자녀가 불법 반입을 시도하다 적발되는 사례가 있고 인터넷, 해외 직구 등을 통한 마약의 불법 거래도 증가하는 추세여서 폐손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THC 성분이 국내 전자담배에 쓰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액상 전자담배는 가열에 의해 유해 화학물질(실리카, 니켈, 크롬 등)이 발생한다. 연기 속 유해 물질의 농도가 태우는 일반 궐련에 비해선 낮다 하더라도 인체에 흡수되는 게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니코틴 외에 프로필렌글리콜, 글리세린 등 다른 액상 성분도 가열되면서 다양한 유기화학물을 생성한다.

최혜숙 교수는 “다른 유해 화학물질 흡입 없이 니코틴 자체만으로도 폐 발달이 저하되고 기도의 만성염증과 폐섬유화가 유발된다. 니코틴이 암세포 성장과 전이를 촉진할 수 있다는 근거도 제시되고 있다”면서 “액상 전자담배 가열시 발생하는 연기 입자는 미세해 폐 깊숙이, 더 많이 흡입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담배가 더 안전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담배유해성분 공개 의무화 법안 국회 통과 여부 주목

20대 국회에는 금연 및 담배규제 관련 법안들이 다수 발의돼 있다. 2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담배사업법 개정안 18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 20여개로 파악된다. 20대 국회의 폐회를 6개월여 남겨 둔 시점에 담배의 유해성을 관리할 주요 법안의 국회 통과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대표적인 게 담배 유해 성분의 제출과 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이다. 현재 담배 포장지에 공개되는 니코틴, 타르 함량 외에 담배 주요 성분 자료를 소비자가 알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6년 처음 발의돼 2년여 상임위 논의를 거쳐 현재 법사위에 올라있어 가장 많이 진척돼 있다. 사실상 본회의 통과만 남겨놓은 셈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법안 내용에 대해 여야간 특별한 쟁점은 없다. 다만 정책 추진 부처를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중 어디로 할 것인지 약간 의견이 달라 조정 중”이라고 말했다. 이 법안을 제외하고 가향물질 첨가 금지법과 캡슐담배 판매금지법, 소매점 담배 진열·광고 금지법, 담배 정의 확대법 등은 관련 상임위에서 단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 미국 액상 전자담배에 의한 중증 폐질환 발생 사태와 신종 담배 등장 등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선 이들 법안의 국회 통과로 법적 근거 마련이 절실하다는 게 복지부 입장이다. 하지만 지금의 여야 대치 국면과 조만간 총선 체제 돌입 상황에서 국회 문턱을 넘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20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은 법안들은 자동 폐기된다. 새로 구성되는 21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논의해야 한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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