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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10월 24일]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


찬송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455장(통 50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 : 이해(理解)는 ‘다스릴 이(理)’에 ‘풀 해(解)’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사물의 본질과 내용을 분별하거나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 잘 헤아려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생기면 흔히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환경을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건 인간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영어에서 이해를 뜻하는 단어는 ‘언더스탠드(understand)’입니다. 언더(under)라는 말은 ‘아래에’라는 뜻이고, 스탠드(stand)라는 말은 ‘서다’입니다. 말 그대로 ‘아래에 서다’는 뜻입니다. 즉 이해는 다른 사람의 위가 아닌 아래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겁니다. 자녀가 부모를 이해하기보다는 부모가 자녀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자녀 밑에 서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학생을 이해하는 것은 학생 밑에 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밑에 서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7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마구간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여관에 누일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 계획 없이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에덴에서 인간이 범죄한 후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창 3:8) 하지만 이는 인간이 있을 곳이 아니라 짐승이 있을 곳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의 자리로 추락시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까지 떨어진 인간을 위해 오셨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며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라고 하셨습니다.(요 6:35) 결국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영원한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짐승의 자리에 추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상대방의 밑에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종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이는 자발적 종이 됨을 의미합니다. 자발적 종의 자리는 위가 아닌 아래로 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눈은 그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서로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형제가 형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당신은 그보다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종의 형체로 낮추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9절) 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기도 : 주님, 어느새 높아진 마음이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판단하고 그를 정죄하려고까지 합니다. 주님, 짐승의 자리까지 추락한 인생을 불쌍히 여겨 말구유까지 내려오신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저희도 낮은 곳에 설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처럼 가정을 사회를 교회를 나라를 살리게 하옵소서. 낮은 곳에 임하신 주님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조춘성 목사(공주 상서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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