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종순 (23) “한국교회가 왜 탈북자들 돕습니까” 막무가내 트집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딴지에 기독교 교류 위한 첫 모임 중단 위기

박종순 목사(가운데)가 2004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중기독교교류회 기자회견에서 중국교회 대표들과 악수하고 있다.

1994년 중국 옌볜에 영상문화원을 열었다. 중국 선교를 위한 초석이었다. 중국인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죽하면 ‘꽌시(關係)의 나라’라는 말이 있겠는가. 중국을 수차례 방문해 많은 이들을 만났고 깊이 교제했다. 중국인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동생들은 나를 따거(大哥)라 불렀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중국 선교를 도울 사람들 아닌가.

살벌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느렸다. 뭐든지 빨라야 하는 한국인이 쉽게 적응할 나라가 사실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중국은 최고였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랜 교류 끝에 깨달은 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옌볜에서 사귄 친구들은 나를 베이징으로 이끌었다.

본격적인 선교는 96년 7월부터 시작했다. 꽌시가 선교의 막힌 길을 조금씩 열어줬다. 그래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한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공안의 눈을 피해 사는 게 선교사들의 일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복음의 결실을 본 선교사들의 노력은 언제 들어도 눈물겹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주먹구구식 관계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뭔가 정례적인 교류 가 필요했다. 중국 친구들과 한·중기독교교류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지만 기독교 역사는 오래됐다. 삼자교회가 공산당 산하의 교회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다. 교류를 통해 동북아시아 기독교의 미래를 논할 수 있었다. 첫 출발이 중요했다.

2003년 9월 양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상하이에서 만났다. 개회식은 11시에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중국 대표들과 언쟁이 벌어졌다. “한국교회가 왜 탈북자들을 돕습니까.”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았다.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탈북자들은 우리의 동포인데 교회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한다는 말인가.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이 목을 맴돌았다. 하지만 서로를 탐색하려는 기 싸움일 뿐이었다. 여기서 중단하면 미래도 없었다.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결국 역사적인 첫 모임이 열렸다. 이를 시작으로 양국 기독교는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력을 했다. 벅찬 기억이다. 양국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기독교 교류도 흐지부지됐다. 안타깝다.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중국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의 역사를 복기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중국교회를 얕잡아 보는 실수를 범했다.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을 무시한 것이다. 심지어 교회 크기와 예산 등을 자랑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서둘렀다. 천천히, 느리게 살아온 이들과 한두 마디 대화한 뒤 모든 일이 성사됐다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만 흥분했고 그러다 실망했다. 혼자 오해하고 혼자 돌아섰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니 무리한 약속도 남발했다. 다 헛발질이었다. 결국, 신뢰가 다 깨졌다. 이를 복원하고 깨진 걸 봉합해가며 한·중교류를 이어왔다.

우리나라와 중국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북한의 빗장을 풀기 위해서도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양국 기독교의 교류사는 다음 회에 소개한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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