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은 죽기 한 해 전 훈요10조를 지었다. 죽음이 가까워 오자 개국공신 박술희를 통해 이를 후세에 전하도록 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전하는 10조 내용에는 불교사찰의 지나친 양적 확대에 대한 경계, 장자 왕권 계승, 서경(평양) 중시 등이 포함돼 있다. 왕건은 “행여 후사들이 방탕해 기강을 문란하게 할까 두려워 훈요를 지어 전하노니, 조석으로 읽어 길이 귀감으로 삼으라”는 유지를 남겼다.

북한에는 유훈통치가 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해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기까지 3년가량을 유훈통치기라 부른다. 2011년 김 위원장이 세상을 뜬 다음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주도의 유훈통치를 공식화했다. 2016년 헌법 개정을 통해 김정일식 선군 정치의 핵심 기관이었던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중심으로 국정체제를 구축한 때까지를 김정은의 유훈통치 기간이라 본다. 선대의 유지를 받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북한 체제는 권력 승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훈을 이어받은 통치를 더욱 강조한다. 유훈이란 수식이 붙는 국정은 그래서 헌법보다 우위에 놓인다.

미국의 전기 작가 더그 웨드가 다음 달 발간하는 ‘트럼프의 백악관 안에서’라는 책에 김 국무위원장이 아버지로부터 “핵무기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작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보좌관인 재러드 쿠슈너를 통해 이런 내용을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북한 당국은 조선반도 비핵화가 유훈이라고 주장해 왔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3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을 받들어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에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보다 몇 주 앞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북특사단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북·미 대화 의제로 비핵화도 논의할 수 있다. 선대의 유훈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헷갈린다. 북측이 유훈을 두고 모순된 언급을 한 것인지, 전언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최근 김 위원장은 금강산을 시찰하면서 너절한 우리 측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다. 금강산관광사업은 선대의 치적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비핵화도 유훈인지 여부보다 결국 김 위원장의 의중이 제일 큰 변수일 것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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