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타다를 기소했다는 뉴스를 읽는데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놀라움이나 의아함보다 먼저 찾아온 불쾌함은 검찰 관계자가 설명한 기소 이유 때문이었다. “이용자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타다) 이용자는 택시를 불러 탄다고 생각하지, 차를 렌트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위반한 유사 택시로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타다 이용자다. 내가 타다를 이용할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저토록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면 검찰은 관심법(觀心法)을 쓰는 게 분명하다. 검찰이 내 생각을 규정해 버린 탓에 나는 ‘유사 택시 이용자’가 됐다. 타다를 부르는 선택을 하기까지 내 머릿속에서 이뤄진 많은 저울질과 가치판단은 그저 ‘택시가 필요했던 것’으로 단순화되고 말았다.

내 스마트폰에는 카카오택시와 타다 애플리케이션이 나란히 깔려 있다. 어떤 때는 택시를 부르고 어떤 때는 타다를 부른다. 일행이 4명을 넘으면 타다를 부른다. 이동거리가 모호해 택시기사에게 눈치가 보일 것 같으면 또 타다를 부른다. 몸이 피곤해 좀 편히 가고 싶을 때 타다를 부르게 된다. 머리가 복잡해 택시에서 마음대로 틀어놓는 라디오를 듣기 싫을 때 타다를 부르곤 한다. 목적지가 택시기사의 선호와 달라 아무리 호출해도 응답 없는 암묵적 승차거부 상황에선 강제배차인 타다를 부를 수밖에 없다. 자꾸 정치 얘기를 꺼내는 기사와 불편했던 기억, 내달리는 택시에서 식겁했던 경험도 타다를 부르게 만든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소비자의 욕구를 검찰은 ‘택시 타면 되는 일’로 뭉뚱그렸다. 나는 검찰 관계자의 말처럼 “택시를 불러 탄다고 생각하며” 타다를 부르지 않았다. 거꾸로 택시를 부르기 싫어서 타다를 불렀다.

검찰은 소비자가 타다를 이용하는 방식만 놓고 따진 듯하다. 택시처럼 호출해 택시와 비슷한 거리를 이용하니 렌터카+운전사의 새 서비스가 아니라 사실상 택시라고 봤다. 서비스를 구분하는 잣대가 그런 거라면, 길에서 손을 들어 잡아타는 택시와 앱으로 불러 타는 택시도 이용 방식에 결정적 차이가 있으니 다른 서비스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타다 기소는 한국의 산업 규제가 얼마나 경직돼 있는지 보여줬다. 기소 이유는 그 속에서 소비자가 얼마나 소외돼 있는지 말해준다. 소비자의 진화하는 욕구를 기존 틀에 구겨 넣고 있다. 그래선 새로운 기술도, 새로운 산업도, 새로운 일자리도 나올 수 없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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