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두 딸이 살아올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세요”

[이용희 교수의 조국을 위해 울라] <10> 북한에 갔다가 탈출한 오길남 박사의 눈물

오길남 박사(왼쪽)가 2012년 6월 서울역에서 개최된 통일광장기도회에서 이용희 에스더기도운동 대표와 기도하고 있다.

오길남 박사는 1942년 출생해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70년 독일 튀빙겐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72년 서독 간호사로 근무하던 신숙자씨와 결혼했다. 8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무렵, 아내가 병에 걸려 휴직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다.

이때 그는 친북 음악가 윤이상으로부터 북한 초청 서신을 받고 북한행을 결심한다. 조건은 대학교수 자리를 주고, 아내를 무상 치료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울면서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내 앞에서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고 간염을 앓는 당신을 치료하려면 북한에 가는 길밖에 없다”며 설득했다.

85년 12월 오 박사는 아내와 두 딸 혜원, 규원과 북한으로 들어갔다. 입북 후 이들은 깊은 산속에 끌려가 3개월간 김일성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했다. 사상세뇌 교육이 끝나자 오 박사는 평양의 ‘구국의 소리’(대남흑색선전 방송국) 방송 요원이 됐다.

이곳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거나 월북한 남한 사람이 다수 근무하는 곳으로 적화 통일 공작기구였다.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마치 남한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퍼뜨려 친북세력을 양성하고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분열시키는 곳이었다. 물론 교수 자리는 없었고 무상치료할 의약품도 없었다.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무상교육제도, 무상의료제도 나발을 요란하게 불어 대지만 모두가 다 빈 깡통이에요. 의약품도 없는데 무슨 의료제도예요. 당신, 인민들에게 나눠 줄 볼펜 하나 변변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돼 있다고 선전해 대지만 죽도록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년퇴직하면 한 달에 20원씩 받아요. 필터가 달린 담배 한 갑 값이죠. 이런 땅이 지구촌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86년 11월, 오 박사는 독일의 남한 유학생 2명을 유인해 입북시키라는 지령을 받는다.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럽게 살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용서할 수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지막까지 망설이자 아내는 내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얼간이 같으니!’ 아내는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었다. 눈에서는 파란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떡거리자 아내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 ‘애들을 보지 말고 그대로 나가세요.’ 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중)

오 박사는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두 딸은 87년 북한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끌려갔다. 오 박사는 독일에 머물면서 유엔인권위원회 등에 호소문을 발송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92년 한국에 귀순한 오 박사는 이듬해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1993~2007년 통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했지만 자신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아내와 딸들을 생각하며 절망과 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중 2011년 아내의 고향인 통영에서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5월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목사와 소신향 사모가 중심이 돼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것은 통영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통영 시민들은 고문 강제노동 성폭행 영아살해 생체실험 집단학살 등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서명을 시작했고 경남 일대와 전국과 해외로 확산하면서 10만명을 돌파했다. 서명지는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됐다.

그해 10월 에스더기도운동은 ‘통일을 향한 월요기도 집회’를 열고 오 박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단상에 함께 있던 나는 오 박사에게 “박사님 이제 하나님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믿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단 위에 올라가서 “아내와 딸들이 살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이 세 모녀를 위해 손을 들고 부르짖을 때, 오 박사도 함께 손을 들고 하나님께 소리 내 기도했다. 술에 취해야만 살 수 있었던 그였다.

신씨와 두 딸의 구출 청원운동이 전 세계로 퍼지자, 북한 당국은 이례적으로 2012년 신씨가 간염으로 이미 사망했다고 유엔에 통보했다. 그러나 오 박사는 사망 시간과 장소, 거주지 등 언급이 없었다며 통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에는 오 박사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출국’이 상영됐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간절히 합심 기도함으로 옥문이 열렸다. 이처럼 한국교회 성도들이 연합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정치범수용소의 옥문이 열리고 오 박사의 딸들이 구출되며 하나님께서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두 딸의 구출에 그치지 않는다. 동포 2500만명이 북한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해방돼 자유와 복음을 누릴 수 있도록 줄기차게 기도해야 한다. 세계 10대 종교로 선정된 ‘김일성 주체사상교’의 모든 압제와 흉악한 결박으로부터 북한 동포들이 구출되도록, 자유롭게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마음과 힘을 모아 최선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용희 교수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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