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 7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수출 절차상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한 뒤 취했던 일련의 행동을 되짚어보면 의뭉스러운 데가 있다. 갈등이 불거진 직후 판세는 분명 한국 쪽에 유리했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을 강조하더니 정작 한국에는 자유무역을 거스르는 조치를 내렸다며 세계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일본 언론조차 아베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일 무역분쟁에 대응하는 국민적 결의도 한국이 훨씬 단단했다. 대기업은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 대상에 오른 첨단 소재·부품을 조속히 국산화하겠다고 공언했다. 국민들은 일본 제품 구매와 일본 여행을 자제하는 불매운동에 들어갔다. 반대로 일본의 수출 기업은 대(對)한국 판로가 막혀 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며 자국 정부를 탓했다. 일본 여행업계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감하자 공황에 빠졌다.

그러자 일본은 다소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규제 대상 품목의 한국 수출을 승인하고 추가 규제도 내리지 않으며 확전을 자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일(對日) 유화 메시지를 담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우리 정부를 감정적으로 자극했다. 우리 정부가 홧김에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을 종료하도록 의도를 갖고 도발했던 것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실제로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하자 판세는 단번에 뒤집어졌다. 미국이 한국에 이례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아베 정권은 미국을 등에 업은 양 으스대며 한국을 때려댔다.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 효력 만료일(23일 0시) 전에 종료 결정을 강행하든 번복하든 결단해야 한다. 강행하면 한·미 관계에 미칠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시리아 철군 사태에서도 드러났듯 종잡을 수가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소미아를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연계해 한국에 막대한 금액을 청구할지도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종료 결정을 번복해 일본에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만들기도 부담스럽다.

결국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일본에 꽃놀이패를 쥐어준 셈이 됐다. 우리 정부는 종료 시한 전에 지소미아 연장과 화이트리스트 제외 철회를 맞바꿔 체면을 차리려는 눈치다. 급할 게 없는 일본은 시간이나 끌면서 우리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느긋하게 지켜보려는 것 같다.

박근혜정부는 친일 정권이었다는 인식이 많다. 그런 박근혜정부조차 집권 초기에는 만만치 않게 강경한 대일 기조를 취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2013년 취임 후 첫 3·1절에 했던 말이다. 박근혜정부는 과거사를 반성 않는 일본을 압박하겠다며 전 세계를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다. 한·일 외교관들은 양국 모두에 핵심 동맹국인 미국을 자기편으로 돌리기 위해 사활을 걸고 맞붙었다.

한·일 과거사 외교전은 한때 한국이 승기를 잡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미국의 과거사 피로감도 임계점으로 치달았다. 아베 정권은 박 전 대통령의 2015년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을 빌미삼아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중국 경사론’을 워싱턴 조야(朝野)에 퍼뜨리며 한·미 관계를 이간했다. 박근혜정부는 가중되는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맺고 말았다.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정부 외교정책에서 변곡점에 해당한다. 이듬해 박근혜정부는 외교가의 뜨거운 감자였던 사드(THAAD) 배치와 한·일 지소미아를 속전속결로 추진하며 역방향으로 폭주했다.

문재인정부가 박근혜정부처럼 냉온탕을 급격히 오가는 식으로 외교정책 기조를 뒤집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유연성을 결여한 대일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외통수에 몰렸던 박근혜정부의 전철을 문재인정부가 되풀이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부 당국자들이 국익에 따른 지혜로운 해답을 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조용하고 원만하게 갈등을 관리할 방법이 없지 않았는데도 굳이 시끄럽고 위험천만한 길을 자청한 판단력만큼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조성은 국제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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