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된 텍스트는 영상과 달라서 이미지로의 번역 과정을 통해서 이해된다. 가령 ‘석양 무렵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가 도시 변두리에 있는 한갓진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문장을 읽을 때 독자는 석양 무렵의 하늘과 거리를 머릿속에 그려야 하고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 도시 변두리, 도시 변두리에 있는 한갓진 여관, 그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그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 문장은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받아들여짐은 거의 항상 완전하지 않다. 모든 독자의 머릿속에 똑같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남자는 얼마나 젊고 어떻게 험악한 걸까. 도시 변두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갓진 여관은? 한갓진 여관의 문은? 그 험악한 젊은 남자는 그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올까? 같은 문장을 제시하고 자기가 읽은 문장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사람마다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환경, 선입견과 고정관념 같은 것이 문장 번역, 즉 그림 그리기에 관여한다. 기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부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석양은 따뜻하고 포근한 인상을 준다. 어떤 사람은 석양에서 신비와 경외감을 느낀다. 쓸쓸함이나 황량함을 느끼는 사람이 없으란 법도 없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전 삶(에 의해 형성된 감각)이 참여해서 하는 번역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외국의 호텔이나 카페에서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속의 시간과 공간, 인물들이 여행지의 시간과 공간의 침입을 받아 변하는 걸 경험한다. 한국 작가가 쓴, 틀림없이 한국의 어느 도시가 배경인 소설을 읽는데도 자꾸만 현재 있는 도시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문장을 이미지로 바꾸는 과정에, 이제까지의 전 삶(에 의해 형성된 감각)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현재의 상태 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석양 무렵의 젊은 남자, 도시 변두리의 한갓진 여관 등이 한국의 어느 도시가 아니라 내가 있는 도시에서 보이거나 보일 거라고 예상되는 모습으로 바뀌어 그려진다. 호텔에 누워서 읽을 때와 카페에 앉아서 읽을 때도 텍스트는 미세하게나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읽을 때와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읽을 때 역시 마찬가지다. 우울할 때와 명랑할 때 읽는 책이 같은 감상을 줄 리 없고, 열여섯 살 때와 쉰아홉 살에 읽는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문자 텍스트의 숙명이다.

있는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명제는 사실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객석의 사이드에 앉으면 자기 쪽 무대는 다른 관객보다 더 잘 볼 수 있지만, 반대쪽 무대는 다른 관객보다 더 잘 보지 못하는 이치다. 한쪽을 잘 볼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다른 쪽을 잘 볼 수 없는 단점도 있는 것이 사이드 객석의 조건이다. 기둥 뒤에 앉은 사람은 어떨까. 그는 기둥 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객석의 조건과 독서 환경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망각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쪽, 그리고 내 눈앞의 기둥 앞에서도 누군가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 다르게 문장을 번역해서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읽는 독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의 양이 무한하고 누구나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확증편향 현상이 더 심화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는 보고가 있다. SNS는 성향의 공유를 통한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같은 쪽에 있는 것은 더 잘 보이게 하지만 다른 쪽에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둥 뒤에 앉아 기둥 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반쪽짜리 무대만으로 연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읽는다고 해서 철수가 앙리가 되는 일은 없다. 독자의 형편에 따라 바뀌는 텍스트는 없다. 그렇게 보일 뿐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가 있는 자리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독서는 위험하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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