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은 출세작 ‘록키’에서 주인공의 시련을 기어이 성공으로 맞바꿔 아메리칸드림을 펼쳐 보이는 할리우드의 허상을 좇지 않았다. 의외로 기억되지 않는 것이 록키 발보아의 패배다. 록키는 상영시간 120분 중 마지막 10분의 클라이맥스로 펼쳐지는 아폴로 크리드와 승부에서 판정패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로, 서른 살까지 전적을 쌓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며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무명의 복서가 록키에게 설정된 인물상이다. 이런 록키가 앞서 모든 도전자를 녹아웃(KO)으로 때려눕힌 헤비급 챔피언 아폴로에게 이긴다면, 그야말로 영화에서만 가능한 비현실이 아닐까.

스탤론은 현실적이었다. 두 복서를 맞붙인 링 주변으로 스크린 너머의 관객을 불러 앉혀놓고 ‘이기는 삶’이나 ‘지는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클라이맥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스탤론은 아폴로를 연기한 배우 칼 웨더스와 실전 같은 15라운드의 복싱 연기를 펼칠 정도로 클라이맥스에 공을 들였는데, 정작 승패를 결정한 순간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 아폴로가 환호하는 장면은 링 위로 몰린 인파에 파묻어 버렸다. 그러니까, 록키의 패배는 이 영화의 결말이 아닌 것이다.

스탤론은 1975년에 이 영화 각본을 썼다. 지금이야 성공한 할리우드 스타가 됐지만, 당시의 스탤론은 뉴욕에 정착한 이탈리아계 이민자 2세대로 살면서 영화판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서른 살 무명 배우였다. 록키는 결국 스탤론 자신이었다.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승부에 뛰어들고 패배해도 툴툴 털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삶, 극중 록키는 물론이고 그를 지켜보는 관객과 그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극장 밖 행인이 살고 있는 삶, 그 시절 스탤론이 그려낸 록키 이야기는 스스로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삶보다 흔한 ‘버티는 삶’이었다.

록키는 아폴로와의 대결을 만류하는 에이드리언에게 말한다. “져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끝까지 버티는 거야.” 록키는 마지막 15라운드를 버티고 졌다. 아폴로에게 몇 차례 치명타를 먹인 것을 빼면 버티는 게 전부였던 록키의 패전은 세상일과 다르지 않다. 이기기 어렵고, 가끔 운이 좋아 이겨도 다시 패배를 마주하는 삶에서 유일하게 선택이 가능한 건 오직 버티는 일뿐이다.

록키를 마치 승자로 기억되게 만든 장면이 있다. 아폴로와의 승부를 앞둔 고독한 훈련에서 새벽바람을 먹고 달려 이르는 마지막 지점, 필라델피아 박물관 계단에서다. 록키는 이 계단을 뛰어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먼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다. 마치 승자처럼. ‘내가 여기에 있다, 록키 발보아가 여기에 있다.’ 무명의 복서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지 않고 외친다. 영화 비평가들에게도 손꼽힌 명장면이다.

승부에서 반드시 하나는 패자가 되고, 무승부에도 환호와 야유가 엇갈린다. 이 한 번의 승부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선수들이 구슬땀을 쏟고 있다. 누군가는 리그를 완주할 내년 봄까지, 다른 누군가는 선수촌에서 4년을 보낸 결실을 맺을 내년 여름 올림픽까지. 계절이 바뀌면 다시 1라운드가 시작된다. 결국 이들도 버텨내야만 한다.

선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러설 수 없는 생업의 링에서 하루하루 방어전을 펼치는 월급쟁이와 자영업자, 책상머리에 고개를 파묻고 데뷔전을 준비하는 취준생은 눈물과 땀방울에 인생을 걸었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승부도 있다. 오는 14일 전국 시험장 1185곳에서 펼쳐질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수험생 55만여명이 각자 다르게 버텨온 기간을 완주할 마지막 라운드다.

늦은 퇴근길 지하철, 세상의 모든 록키 발보아들이 후들대는 두 다리를 지탱하고 서 있다. 아침에 꼿꼿이 세웠을 옷깃이 반쯤 무너진 중년과 무거운 가방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청춘, 쪽잠을 청하면서도 새까매진 수첩을 손에 쥔 수험생이 마지막 라운드를 펼치는 곳이다. “져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끝까지 버티는 거야.”

심술궂은 삭풍은 언제나 수능이 다가올 때를 골라 찾아왔다. 구름조차 달아나는 늦가을 추위의 밤하늘에서 별은 유독 밝게 빛난다. 그 별이 새벽 첫차와 심야 막차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 모든 발걸음을 비출 것이다. 스스로에게 인사하자. ‘잘 버티자, 잘 버텼다’고. 록키 발보아가 그랬던 것처럼.

김철오 스포츠레저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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