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우리는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 성서에서 말하는 감사는 어떤 것일까? 복음서에는 모두 네 번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실 때의 기도다.

한 어린 아이가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마가 6:41). 요즘은 보리떡을 건강식으로 먹지만 당시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생선 두 마리도 아마 말라비틀어진 작은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저 어린이 한 명이 하루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놓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떡과 물고기를 앞에 두고 감사한 것이 아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감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기적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초라한 음식이지만 진심어린 감사의 기도였다. 바로 그 기도가 기적을 낳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출발은 계산 없는, 진실한 그 감사의 기도였던 것이다.

현대인의 삶에는 이런 순수한 감사의 기도가 매우 희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큰 사건, 중요한 일에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다. 절실히 원하는 것들이 자신의 바람대로 이뤄졌을 때 흥분해서 감사하곤 한다. 주로 화폐가치로 연결되는 것들에 감사를 한다. 하지만 성서의 감사는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다. 성서에서의 감사는 인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발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다.

추수감사절은 1623년 미국 청교도 개척자들에 의해 시작됐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땅에 정착해 첫 농사를 지었지만, 그해 겨울 개척자의 절반이 굶어죽었다. 어렵사리 첫 수확을 거뒀지만 소출은 겨우 하루에 옥수수 다섯 개를 배급받는 정도였다. 혹독한 추위와 농사의 어려움으로 결국 그 겨울 개척자들 중 절반이 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극심한 궁핍과 남루함, 막막한 미래 앞에서도 그들은 감사했던 것이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서 감사한 게 아니다. 비참한 배고픔과 처절한 가난의 현장 한복판에서도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것이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이런 감사는 구약성서 하박국 3장에 나오는 감사를 생각나게 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지금 어떤 상황인가? 온갖 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는 소출이 없고, 게다가 외양간에 가축마저 없다면 완전히 실패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한다. 인간이 신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열정적인 감사의 기도다.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 연결돼 있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의 기도다.

우리들에게 하루치 ‘일용(日用)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 감사가 기적을 낳았다. 내 삶에도 그런 기적을 낳는 감사가 넘칠 수 있을까?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발견하는 은혜에 대한 감사, 거듭되는 좌절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작은 의미들에 대한 감사, 생(生)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감사, 이런 감사가 있다면 우리들 각자의 삶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다. 사실 그런 감사 자체가 곧 기적이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이런 기적이 넘치는 풍성한 절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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