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 대화에서 한·일 관계의 변화 징후를 볼 수 있다. 정상뿐 아니라 양국 국회에서도 소통 채널들이 가동되고 있다. 이처럼 소원했던 양국이 대화 국면을 만들게 된 이유는 오는 23일 지소미아 종료 시점까지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야 한다는 초조감이 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대일 정책의 근본 전제를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까지 대일 정책은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한다는 것이 근본 전제였다. 그러나 최근 아베 정부 태도는 이를 흔들고 있다. 최근까지 한·일 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성의 있는 행동이 전제됐다. 따라서 과거사 문제는 일본이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즉, 과거사 문제는 대일 관계에서 한국이 사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그러나 요즘 일본의 모습은 정반대다. 과거사 문제에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징용공’ 문제만 하더라도 일본은 더 이상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에 징용공 문제 해결책을 가져오라고 촉구한다. 심지어 한국은 징용공 문제로 일본에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징용공 문제에 대해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문제라고 치부한다. 문제는 일본이 작심하고 한국을 압박하면서부터 한·일 관계에서 한국이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 된 점이다. 일본 국민들조차 한국의 주장에 귀를 닫고, 한국 압력에 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변한 것이 슬프게 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과거사에 대한 성의 있는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과거의 유물이 되고 있다.

또한 한·일 관계에서는 미국이 항상 한국편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을 통해 일본을 압박하는 것은 한국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적 카드였다. 수출규제 조치로 촉발한 일본의 막무가내식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는 미국이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결과는 의도치 않은 상황을 만들었다. 특히 지소미아 카드를 통해 일본을 압박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던 일본을 탓하기보다 한국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증액을 요구하고 한국에 지소미아를 되돌리라고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이 틈을 이용해 독도를 침공했다. 미국의 중재로 일본을 제압하고자 했던 기대는 트럼프 시대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국제 관계의 변화에 대한 전략적 고려 없이 감정이 앞선 결과가 가져온 실패였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으면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 정치가 걸림돌이 되고 있어 지소미아를 본래로 되돌리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처럼 한·일 관계의 근본 전제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낙연 총리의 방일에서부터 시작한 한국의 대화 노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힘들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관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한국이 징용공 문제에 대한 해법을 통해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지만 일본의 징용공 문제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한·일 정상들의 정치적 결단밖에 없다. 이마저 쉽지 않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한·일 관계 악화를 막는 동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는 징용공 문제의 현금화 조치를 연기하면서 일본은 수출규제를 실질적으로 완화하는 타협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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