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시애틀을 방문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보잉 등 글로벌 기업의 본거지이자 너바나·펄잼 등 1990년대 얼터너티브록을 태동한 고장,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만추’ 등 명화의 배경으로도 익숙한 도시.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가장 낯익은 수식어라면 바로 ‘스타벅스의 고향’일 것이다.

실제 시애틀에는 스타벅스 매장이 정말 많았다. 스타벅스 1호점과 첫 스타벅스 리저브(프리미엄 매장)를 위시해 거짓말 좀 보태 한 블록 건너 하나씩 보였다. 전 세계 도시들 중 8번째로 많은 매장(140여개)이 있는데 글로벌 1위 매장수를 자랑하는 서울을 필두로 뉴욕, 상하이, 런던 등 세계적 대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구 밀도 대비로는 단연 최고 수준이라니 확실히 ‘별다방’의 원산지라 하겠다.

커피의 고장에 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심부름도 있었고, 알아서 준비해야 할 선물도 있어 짧은 체류기간 동안 두어 차례 1호점과 리저브 매장을 방문했다. 호텔 룸에도 스타벅스 커피가 준비돼 있었으니 딱히 커피향을 즐기러 찾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문 때마다 매장은 항상 붐볐다. 마찬가지 목적으로 원두, 텀블러, 머그 등을 구매하려는 관광객들이 커피를 마시는 현지인들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들이 즐기는 커피 문화의 본산을 찾아 소장할 추억을 구매하는 일종의 ‘성지순례’ 행렬에 가까웠다.

한동안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은 경제·산업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세계 수준에 맞춰 우리를 끌어 올리고, 문화를 해외에 알리자는 캠페인이 만연했다. ‘한류’ 열풍이 최근까지도 문화적 경쟁력을 상징하는 가장 큰 자랑거리였으며, ‘한식의 세계화’ 등 여러 지류를 낳았다. 하지만 시애틀과 스타벅스의 성공사례를 보며 느낀 것은 오히려 ‘로컬라이제이션(지역화)’이 새로운 시대의 지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커피라는 문화와 그에 따른 특화산업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개성과 차별점을 상업화한 스타벅스, 그리고 시애틀은 각자 사회문화적 욕망을 확인하고자 하는 밀레니얼세대의 특성과 맞물려 전 세계적 성공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잘나가는 ‘향토 기업’에 대한 동경보다도 일상을 향유하는 ‘커피’라는 필수요소에 대한 취향과 지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관광산업에서 역시 스타벅스를 앞줄에 내세우는 현지인들의 자부심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도 이젠 이런 트렌드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종 축제와 관광 명소를 만들어내는 일은 이제 식상한 수준이지만 일정부분 지역 정체성과 개성의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지인처럼 생활하고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경험을 추구하는, 동시에 각자의 일상에서 재확인할 수 있는 커피와 같은 보편적 ‘콘텐츠의 힘’이 곁들여지지 않아 시끄러운 난립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과거 ‘e스포츠의 성지’로 통했던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이나 광안리 해수욕장 등은 업계 이해관계, 당국의 몰이해가 맞물려 글로벌 로컬 명소로 발돋움할 기회를 스스로 상실했던 전례도 있다.

그럼에도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우리 로컬문화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먹방’의 세계적 유행을 불러일으킨 크리에이터적 저변, BTS 등으로 상징되는 건재한 K팝 한류, 전성기에 비해 다소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한 e스포츠 기반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요 콘텐츠와 한국은 연결점이 퍽 많다. 방법론적으로도 로컬의 가치에 주목한 각종 노력이 여기저기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서핑 콘텐츠를 특화시킨 강원도 양양의 서핑비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해 도시콘텐츠를 판매하는 로컬 비즈니스 업계의 선두주자 서울 연남동 어반플레이 등이 눈에 띈다.

정부도 경각심을 가지고 이 같은 문제를 살피는 분위기다. 지역 문제 해결과 로컬 문화 창출에 앞장설 로컬 크리에이터에 대한 지원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국의 정책 지향과 로컬 크리에이터 및 비즈니스 저변 확대, 다양한 플랫폼 등이 맞물려 창조적이고 탄탄한 일상 속 로컬 콘텐츠가 우리만의 ‘스벅’ ‘노키아’처럼 열매를 맺길 바라본다.

정건희 산업부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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