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김지영은 거실에서 두 살 정도 된 딸이 “엄마”라고 부르자 고개를 돌리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내 눈엔 그 장면이 웃는 게 아닌 걸로 보였다. 잠시 노을을 감상할 틈도 없이 엄마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살림과 육아를 뒤집어쓴 ‘독박 육아’의 주인공이자, 복직하고 싶지만 애 봐줄 사람이 없어 못하는 ‘경력단절 여성’의 쓸쓸함이 녹아 있는 표정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이 행복하다 되새겨보지만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 앞으로도 딱히 나아질 일이 없는 인생. 김지영에게 그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마지막까지 참 짠하고 슬프고 안타까웠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후 3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순항 중인 영화는 개봉 전 평점 테러와 악플 세례에 시달렸다. 페미니즘 영화로 인식되면서 개봉을 중단해 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이어졌지만 막상 개봉하고 나니 관객들의 호평과 공감이 이어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가 2016년 출간한 동명 소설의 주인공이다. 자라면서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고, 결혼 후엔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다. 책은 130만권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영화로 재탄생한 김지영은 ‘순한 맛’이다. 김지영 주변에 자극적인 사람은 없다. 자상한 남편,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엄마, 대한민국 평균 정도인 시어머니, 조력자인 직장 여성 동료와 선배. 이만하면 꽤 괜찮은 조합인데도 김지영은 아팠다. 딸로 태어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고 여성 직장인이 되면서 누구나 느꼈을 보이지 않는 평범한 차별이 결국 김지영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김지영은 속이 상했다. 회사에 다니며 내 일을 하고, 내가 번 돈으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전쟁 같은 육아 속에 잠시 유모차를 끌고 공원에 앉아 커피 한잔하고 있을 때 들리는 “팔자 좋네”라는 말을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김지영은 힘들게, 그리고 운 좋게 재취업 기회를 얻지만 베이비시터를 못 구해 절망한다. 그때 남편이 위로라고 하는 말은 “그래 좀 더 쉬자.” 김지영은 이렇게 쏘아붙인다. “당신은 집에서 애보고 집안일하는 게 정말 쉬는 것 같아?”라고.

돌이켜보면 70년생인 나는 운이 좋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 세 명을 낳았다. 나 역시 사회가 책임져주는 육아가 아니었고 또 다른 여성인 엄마와 시어머니의 희생이 동반된 육아였다. 대체로 순탄했지만 두 분 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때도 있었다. 집으로 오는 도우미부터 24시간 어린이집 등 여러 형태의 보육을 전전했는데 그땐 사소한 일에도 울컥했다. 그렇게 세월은 훌쩍 흘렀지만 육아 현실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미래는 어떨까. 99년과 04년생인 내 딸들이 살아갈 세상은 과연 더 나을까. 아닐 것 같다. 90년대 2000년대 생인 딸들은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기약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좌절했던 앞 세대의 비극을 잘 아는 영리한 세대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강하다. 육아가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해결되지 않고 개인의 책임과 희생이 된다면, 딸 세대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집안일은 그저 도와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남편에게 “도와 달라”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우스개로 이런 말을 한다. “아니, 공유가 남편인데 왜 우울하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편이 배우 공유라도 극복이 안 될 정도로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그러니까 이건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사회의 문제인 거라고. 육아를 책임지는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는 대한민국. 차별받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잘못인지 공감도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 모두 달라지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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