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감내하기 어렵고, 시급히 해소하고 싶은 욕구 중 하나가 배고픔이다. 그러나 배고픔이 해소되면 나태해지고 무기력증에 빠지기 쉽다. 미국 애리조나 아파치족이 그랬다. 이들은 처음에 신대륙에 정착한 이주민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식량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애리조나 주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싸움을 끝냈다. 이들은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사냥할 이유도 없었다. 그 결과 아파치족의 40% 이상이 비만이나 무기력증에 빠졌다고 한다. 배부름의 역설이다.

우리나라는 1960~1990년대 압축성장을 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시대정신이 헝그리 정신이다. 헝그리 정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그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는 게 가능했을까. 돌이켜보면 앞만 보고 달린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헝그리 정신은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와 일맥상통한다. 군대에서 귀 따갑게 듣던 구호다. 부지불식 간에 이런 DNA가 몸에 밴 게 아닌가 싶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본선 16강에 진출했을 때 전국이 열광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만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I am still hungry)”고 했다. 16강전 상대 이탈리아에 패했어도 명장 반열에 올랐을텐데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먼 곳을 내다봤다. 히딩크가 16강 진출에 만족했다면 4강 신화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강조한 말도 헝그리 정신이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며칠 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아직도 갈 길이 남아 있다”면서 “여전히 저희는 배가 고프다”고 임기 반환점을 돈 문재인정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정부·여당에서 자성보다는 자화나 자찬이 많은 걸 보면 배고픈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배고프다면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전 사회 영역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했을 게다.

다시 잡스의 졸업식 연설문을 들어보자. “만족하는 자 성장하지 못하고 아는 자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한다. 배부른 자 미래를 열지 못하고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자 창조하지 못한다. 만족하지 마라.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잡스가 10여년 앞을 내다보고 문재인정부를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이흥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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