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오치제를 바른 소녀’의 첫머리에는 구현성 작가가 그린 강렬한 일러스트 작품이 여러 점 실려 있다. 소설 속 이야기를 시각화한 것들로 저 그림 역시 그중 하나다. 알마 제공

미국 마블 스튜디오가 내놓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화려한 캐스팅, 막대한 투자, 철저하게 계획된 홍보,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 거기에 독특한 역사관까지. 개봉될 때마다 국내 상영관들을 죄다 잠식해버리는 그들의 상업성은 대단한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내는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은 그들을 바라보는 어린이들에게(아니, 어쩌면 어른들에게 더) 장밋빛 미래를 선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 슈퍼히어로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문제가 있었다. 슈퍼히어로들은 하나같이 백인이었다는 것.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DC코믹스의 슈퍼히어로 슈퍼맨과 배트맨이 그렇고 마블의 슈퍼히어로인 아이언맨이나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백인이고 남성이다. 왜 모두 백인 남성일까? 왜 백인 남성이어야만 할까? 고민할 새 없이 엄청난 자본력으로 밀려들어 오는 서구의 현란한 문화 앞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환호하면서 그들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변화해야만 하고, 변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변화는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마블 슈퍼히어로의 변화에서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마블 캐릭터의 원년 멤버 격인 여성 캐릭터 ‘블랙 위도우’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블랙 위도우 단독 주연 영화가 내년에 개봉할 예정이다)이 그렇고, 새로운 흑인 히어로 ‘블랙 팬서’(2018)와 새로운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2019)이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기 또 하나의 새로운 히어로 등장을 예고하는 소설이 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소설 ‘빈티-오치제를 바른 소녀’다. 소설 ‘빈티’로 2016년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작가로 참여한 영화의 제목을 듣는다면 그는 단번에 당신에게 친근해질지 모른다. 그는 앞서 언급한 ‘블랙 팬서’의 작가다.

1974년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 은네디 오코라포르는 흑인 여성이다. 그의 부모는 나이지리아 이민자다. 그는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친족들과의 교류와 여행 등을 통해 나이지리아 문화를 가까이하며 자랐다. 이렇게 생성된 그의 정체성이 ‘블랙 팬서’와 ‘빈티’를 만들었을 거다. 오코라포르는 그간 할리우드에선 상상하기 힘들었던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 ‘아프리카’와 ‘미래주의’의 합성어)’을 정착시킨 핵심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최근 ‘아프리칸퓨처리즘(Africanfuturism)’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빈티: 오치제를 바른 소녀’는 ‘빈티 시리즈’ 3부작 중 1부로, 인간과 외계 종족 메두스 간의 갈등을 봉합하며 우주의 중재자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활약상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빈티’에서는 새로운 히어로가 등장하는데, 그는 흑인이자 여성이자 소녀다. 사회적 소수자로 대변되는 그는 여타 히어로들처럼 초월적 괴력이나 뜻밖의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첨단 기기를 제작하는 재능과 자신의 부족 힘바족의 땅에서 만들어진 ‘오치제’(기름 진흙), 그리고 고향의 사막에서 발견한 ‘에단’(신비의 구슬)이 전부다.

움자 대학행성으로 머나먼 유학길을 떠난 빈티는 근거리 왕복선 안에서도 10대 소녀이자 소수민족, 그리고 흑인 여성으로서 끊임없이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하지만 긴 항해 동안 친구들을 사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왕복선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닷새 전 그들의 왕복선은 외계 종족 메두스에게 공격을 당하고 만다. 빈티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극복하고, 사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빈티(binti)는 아프리카의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의 딸’을 뜻한다. 먼 우주에서 벌어지는 빈티의 모험을 마지막까지 같이한다면, 그는 ‘낯선 누군가’에서 ‘우리 모두의 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블과 강하게 연결된 작가의 새로운 슈퍼히어로를 영상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큰 매력이다.

<임경섭·출판 편집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