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를 쓴 서보 머그더(1917~2007)가 생전에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헝가리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그는 1947년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어떤 글도 발표할 수 없었다. 다행히 56년 출판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후엔 소설 시 아동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수준 높은 작품을 쏟아냈다. 프시케의숲 제공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버린 것이었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헝가리 장편소설 ‘도어’를 읽으면 어쩔 도리 없이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저런 문장부터 떠올리게 된다. 두 작품의 구성이나 등장하는 캐릭터의 느낌이 서로 비슷해서다. 도어는 화자인 주인공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인물을 내세워 인생의 의미를 심문한다. 소설 속에는 조르바처럼 앎의 가치를 낮잡아보고, 신을 조롱하고, 몸으로 무언가를 얻는 삶이 최고라고 여기는 인물이 별처럼 빛나고 있다.

동시에 도어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현대문학의 숲에 높게 솟아오르는 봉우리가 될 만한 작품이다. 강렬한 캐릭터와 이야기, 뭉근하면서도 선득한 메시지가 모두 담겨 있다. 헝가리에서 1987년 출간된 작품이니 한국 독자로선 너무 늦게 마주한 수작인 셈이다.

자비의 광인

소설은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된다. 작품의 기둥을 이루는 인물은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와 가정부 에메렌츠다. 주인공은 도입부에서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고 고백한다. “나를 믿은 그녀와 나 자신을 믿은 나, 우리 둘 모두는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를 상대로 두 사람 사이에 파국이 예정돼 있음을 미리 알린 뒤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펼쳐지니 이들이 각각 어떤 캐릭터인지부터 살펴보자. 주인공의 직업은 작가다. 전업 작가의 삶을 막 시작하려던 이 여성에겐 가정부가 필요했고, 공동주택에서 관리인 역할을 하던 에메렌츠를 대면한다. 그런데 에메렌츠는 범상치 않은 할머니였다. 고용주가 갑(甲)이어야 할 텐데 그는 자신이 섬길 ‘주인’을 심사하려 든다. 주인공 부부의 평판을 알아봤고 보수도 스스로 정했다. 한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의 실력은 주인공의 상상을 초월했다. “노동 강도와 힘으로 보자면 초인적인” 수준이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에메렌츠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 스토리를 감질나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에메렌츠는 강퍅한 노파여서 이웃에겐 “필수불가결한 접근”만 허용했다. 월급 외에 별도의 사례는 받지 않았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주인공 같은 사람은 같잖게 여겼다. 그는 반(反) 인텔리주의자였다. “윤기 나게 다듬은 말들”을 혐오했다. 동시에 “자비의 광인”이기도 했다. 아픈 이웃을 살뜰하게 보살폈고 마을 청소를 도맡았다. 많은 이들에게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이웃이었다.

주인공과 에메렌츠는 20여년을 함께했다. 처음부터 에메렌츠가 주인공에게 곁을 내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남편이 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순간을 같이 통과하고, 에메렌츠가 주인공의 집을 빌려 오매불망 기다린 손님을 맞으려다 허탕을 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귀가 부러진 강아지 조각상을 주인공 집에 들여놨다가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둘은 각별한 사이로 거듭난다. 누군가 주인공의 집을 방문하면 에메렌츠를 주인공의 할머니나 대모(代母)로 여길 만큼 이들은 유사 가족의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그렇다면 에메렌츠는 누구이며, 주인공을 만나기 전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의 인생 궤적엔 전쟁이 남긴 참상이 진한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열세 살 나이에 가정부 생활을 시작했으며, 약혼자였던 제빵사는 엄혹한 시기에 “빵처럼 갈기갈기 찢겨” 세상을 떠났다. 이런 스토리 외에도 그의 과거를 들추면 굴곡진 사연이 한두 개가 아니다.

괴팍한 에메렌츠는 그 누구도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에메렌츠 집의 현관문은 그녀의 마음으로 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반부로 가면 주인공은 결국 이 집에 들어서는 걸 허락받게 된다. 에메렌츠는 무슨 이유에서 그동안 집에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던 걸까. ‘에메렌츠의 문’을 통과한 사람은 어떤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될까.

존엄에 관해 묻다

에메렌츠가 병에 걸리고 2주 넘게 두문불출하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어머니나 진배없는 에메렌츠를 끌어내 병원에 보내려고 주인공은 ‘작전’을 감행한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 시기가 주인공이 작가로서 유명 문학상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때였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하느라, 방송에 출연하느라, 인터뷰에 나서느라 에메렌츠의 주변을 지키지 못한다. 에메렌츠를 집에서 끌어내려는 작전이 벌어지고, 주인공은 그 작전에서도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이 일 때문에 결국 두 사람 관계는 사달이 난다.

작전이 무엇이었으며, 작전이 펼쳐질 때의 광경이 어땠는지, 그리고 이후 펼쳐질 이야기에 대해선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하나만 귀띔하자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은 결국 각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것이 기어코 소통을 무망한 일로 만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갖가지 상징들에 작가가 각각 어떤 의미를 매설해놓았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이 책이 선사하는 재미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 가능한 지점도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

어쩌면 작가가 완벽하게 이야기를 장악했을 때 가능한 소설이 바로 이런 작품일 것이다. 도어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어느 하나 허투루 언급되는 게 없는 단단한 벽돌 같은 책이다. 소설을 쓴 서보 머그더(1917~2007)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통하는데, 그의 책은 현재 지구촌 곳곳에 40여개 언어로 출간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독자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기 짝이 없다. 그간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안거리를 찾자면 영어권 독자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015년 6월에서야 도어를 다룬 서평을 게재하면서 “이 걸작이 영어권 독자에게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고 보도했고, 그해 연말 도어를 ‘올해의 책’에 선정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한국어판 추천사에 “여름과 겨울을 보내며 나는 이 소설을 천천히 세 번 읽었다”며 “400쪽이 안 되는 소설을 4000쪽짜리 대하소설인 양 읽어야 했다. 4000쪽만큼의 감정이 400쪽에 응축돼 있었기 때문이다”고 적었다.

책에서 마주하는 글귀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에메렌츠는) 작품에서 기계나 기술로 나뭇가지를 흔들지 말고, 실제적인 열정으로 그렇게 했으면 하는 요구를 남겼다. 나에게 조금 과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에메렌츠가 준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어쩌면 에메렌츠의 충고는 작가가 도어를 쓰면서 깨달은 부분이면서, 후대의 작가들에게 전하는 조언일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