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동가정의학과 백재욱(가운데) 원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지역본부 소속 한주성(오른쪽) 약사가 지난 7일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에 홀로 사는 신모 할머니집을 방문해 복용 중인 약물의 처방 조정과 복약 상담을 해주고 있다.

10종이상 약 처방받은 환자 대상 가정 방문·전화 상담통해 서비스…연내 대상자 3000명으로 확대
10종이상 약 복용 72만여명 중복 복용·부작용 우려 갈수록 커져


지난 7일 오후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단지. 홀로 사는 신모(81) 할머니 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이고, 원장님이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직접 와 주시다니….” 신 할머니는 평소 안면이 있는 듯 반가워하며 현관에 들어선 백재욱 동동가정의학과 원장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이끌었다.

백 원장과 같이 온 간호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 서울지역본부 소속 한주성 약사도 함께 침대 옆 좁은 공간에 자리잡았다. 할머니는 침대에 걸터앉아 뜻밖의 방문자들을 의아한 표정으로 둘러봤다.

백 원장 병원은 신 할머니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가 10년 넘게 다니는 단골이다. 최근 무릎이 아파 거동이 힘들면서 병원 발걸음이 한동안 뜸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만 보던 의사가 직접 집을 찾았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을 법하다.

백 원장이 웃으며 “할머니, 드시고 계신 약 있으면 전부 꺼내 와 보세요”라고 주문했다. 옆에 있던 한 약사가 “영양제나 건강기능식품도 먹는 게 있으면 다 가져오라”고 거들었다.

할머니는 서랍과 선반, 식탁 위를 뒤져 약들을 주섬주섬 챙겨와 방바닥에 늘어놨다. 고혈압, 협심증, 당뇨병, 심부전, 고지혈증, 통풍, 관절염, 위장질환, 변비, 콧물 알레르기약 등 무려 12가지나 됐다. 벽 찬장을 살피던 간호사가 “할머니, 이건 뭐예요”하며 칼슘제와 유산균제, 잇몸 염증약(소염제), 인공눈물 등을 추가로 꺼내왔다.

방바닥에 놓인 약들을 살피던 백 원장이 “대부분 우리 병원에서 처방한 약들이긴 한데, 일부는 다른 의료기관의 약”이라면서 “할머니, 약 드시고 몸이 안 좋거나 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신 할머니는 “특별히 그런 적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방팔방 약 타러 다니는 사람들

백 원장에 따르면 노인들은 약 타러 사방팔방 다니고 나중에 약이 쌓이면 어디서 어떤 약을 처방받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성분의 약 중복처방은 상호 작용으로 인해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

백 원장은 “어르신들은 의사 처방대로 약을 안 드시거나 복약 시간을 지키지 않고 아예 빼 먹는 경우도 많다”면서 “특히 아침 약은 잘 챙겨 먹지만 저녁 약은 유독 잘 거르기 때문에 30% 가량 남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신 할머니도 “혼자 있으니까, 약 먹는 걸 깜빡하거나 먹는 시간을 놓칠 때가 많다”고 했다.

신 할머니의 약 포장을 주의깊게 들여다 보던 한 약사는 “8~9가지 약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버려야 한다”면서 “잇몸 염증약의 경우 3년이나 지나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고 했다. 또 “영양제나 건강기능식품을 처방 약과 함께 먹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약과 혼돈해 정작 복용해야 할 약은 안 먹고 영양제만 먹거나 생각날 때만 먹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약사는 신 할머니의 처방 약 종류와 유통기한, 복용 습관 등을 상담 기록지에 꼼꼼히 기록했다.

백 원장과 한 약사는 1시간 가량 처방 및 복약 상담을 한 뒤 마지막으로 ‘약 달력’을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약 달력은 한 달 분량의 약을 일자별로 넣을 수 있도록 디자인 돼 있어 약 복용을 도와줄 사람이 없거나 건망증이 있는 노인들이 약 복용을 잊거나 중복해 복용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이날 백 원장과 한 약사의 신 할머니 집 방문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서울시의사회가 함께 지난 9월부터 시범사업 중인 ‘올바른 약물 이용 지원사업(의사 참여 모델)’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노인 인구와 복합 만성질환자의 증가로 여러 약물을 한꺼번에 복용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약물 관리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복용하는 약물 개수가 많을수록 중복 처방이나 부작용 발생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제 건보공단 조사 결과, 국내 65세 이상 노인의 46.6%가 5개 이상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고 그 중 부적절한 약물 처방이 47%에 달했다. 5개 이상 약물 처방군(47.0%)은 4개 이하 약물 처방군(13.8%) 보다 부적절 처방률이 33.2%포인트 더 높았다. 약물 처방 개수가 늘수록 입원과 사망 위험이 높아졌는데, 11개 이상 복용군은 2개 이하 복용군보다 5년간 입원 및 사망 위험이 각각 45%, 54% 높았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1개 이상 갖고 있으면서 10개 넘는 약을 복용하는 환자가 지난해에만 72만4000명에 달했다. 고령화 추세를 감안할 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요양시설 입소 노인의 44.9%(2013년 기준)가 부적절한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공단은 이런 여러 약물 복용과 부적절한 처방의 해결책을 찾고자 지난해 7월부터 올바른 약물이용 지원 시범사업(약사 참여 모델 등)을 시작했다. 12월까지 6개월간 서울·경인 9개 지역과 요양원 2곳에서 684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한 결과 93.1%가 만족했고 서비스 재이용 요구도 81.6%로 높게 나왔다. 하루 복용 약물 수도 13.8개에서 12.5개로 줄었다.

이에 올해는 서비스 대상 만성질환을 기존 4개(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만성신부전)에서 13개(기존 4개+간질환, 대뇌혈관질환, 신경계질환, 관절염, 갑상샘장애, 암, 정신·행동장애, 호흡기·결핵, 천식·만성폐질환)으로 확대하고 대상자도 3000명으로 대폭 늘려 추진 중이다. 대상자는 13개 만성질환 중 1개 이상 진단받고 10가지 이상 약을 처방받은 환자다. 선정되면 지역 약사회 소속이나 건보공단 소속 약사가 가정방문, 전화상담 등 총 4회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약물 부작용이 의심되면 의사 상담을 받도록 안내하고 있다.

9월부터 ‘의사 참여 모델’ 시작

건보공단은 지난 9월부터 의사가 공단 소속 약사와 함께 대상자 집을 직접 찾아가 약 처방을 조정해 주는 ‘의사 참여 모델’ 시범사업에 들어갔다.

현재 서울 16개 지역구에서 36개 의료기관(가정의학과, 내과, 정형외과 등 중심)이 참여 중이다.

각 의료기관 환자 중에 약물 관리가 필요한 사람을 선정해 집을 방문하고 필요시 중복 약물이나 처방 일수 등을 조정해 준다.

공단 관계자는 18일 “아직 초창기라 지난 11일 기준으로 30여명이 등록해 서비스를 받고 있다”며 “향후 200~300명까지 목표 인원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의사회 박홍준 회장은 “환자들의 올바른 약물 사용을 위해 의사회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범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개선점을 지속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의사나 약사들이 일정 정도 본업을 희생하고 참여하는 만큼, 그에 맞게 현실성 있는 인센티브(서비스 수가)가 주어져야 충실한 상담 등 실효성을 거두고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 향후 대상자 확대 등에 대비해 공단 소속 약사·간호사 등 인력과 예산의 충분한 확보도 필요해 보인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불필요한 약물 복용을 줄여 건강보험 재정 절감에도 도움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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