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미국 새댁’ 밧줄 타고 한양 성벽 넘은 까닭은

42년간 한국 선교 헌신한 매티 노블 선교사와 서울 서대문

1892년 10월 21일 밤 9시 조선 선교를 위해 한양에 도착한 매티 노블 선교사 부부가 밧줄에 몸을 의지해 넘었던 돈의문 부근 한양 성곽. 밤 8시쯤 성문이 닫혀 부득이 담을 넘어야 했다. 부부는 그해 8월 11일 고향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이날 한양에 도착했다. 사진은 돈의문 터 북쪽 서울기상관측소와 맞닿은 성벽 모습이다.

원주민 선교에 실패한 선교사가 십자가에 묶여 산 채로 이구아수 폭포 밑으로 던져졌다. 이렇게 절망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또 한 사람의 선교사가 폭포 위 미선교지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션’의 초반 장면이다. 천신만고 끝에 오른 선교사는 오보에를 꺼낸다. ‘가브리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가 울려 퍼진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 1:5)는 주제의 이 영화는 30여년이 지났음에도 명작으로 사람들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1892년 10월 21일 밤 9시 조선 한양도성 돈의문(서대문).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해 8월 1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러 고향 집을 떠난 새댁 매티 노블은 두 달 열흘의 항해 끝에 마침내 선교지 조선 한양에 닿았다. 그들은 이날 아침 9시 제물포항에서 증기선을 타고 한강을 거슬러 마포나루에 하선했다.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1866~1945)이 있어 매티는 고단한 줄 몰랐다.

매티 노블 (1872~1956)

부부는 윌크스배러 와이오밍신학교에서 만나 사랑을 키웠고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에 참여하면서 조선 선교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그리고 6월 결혼했고 8월 선교지로 떠났다.

‘서울은 성벽을 두른 도시였다.… 성벽 높이가 9m나 됐다. 성벽을 타고 넘으면 사형이라는 중벌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은 추방형이다.… 성벽 안쪽으로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이 있었다. 몇몇 신사들이 가파른 돌벽을 타고 올라가서 밧줄을 잡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밧줄을 허리에 묶자마자 재빠르게 끌어올려 주었다. 잠시 후 우리들의 대부대가 모두 벽을 넘었고 아서와 나는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1892년 10월 21일 매티 노블의 일기 중)

127년 전, 노블 부부가 밧줄을 타고 넘었던 성벽 장면은 영화 ‘미션’의 이구아수 폭포를 오르는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자 도착한 조선은 누구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바람 앞에 촛불 신세였다.

그해 조선. 3월에는 함경도 함흥부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6월 제주에서 일본 어민이 난동을 부렸으며, 경상도 예천에선 광산 채굴에 항의해 백성이 난을 일으켰다. 이미 호남과 충청에선 동학교도들이 척일척양을 외치며 민심을 얻고 있었다. 부패한 조정은 조선 상권을 일본이 장악해 가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이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조짐 속에서 부부가 도착했다.

다행히 1887년 아펜젤러가 정동교회, 엘라스가 정신여학당 등을 설립하면서 그나마 희망을 품던 무렵이었다. 흉년과 민란 속에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선교사 부부, 밧줄에 몸을 감다

이달 중순, 노블 부부 일행이 한밤중 넘었던 ‘성벽 안쪽 높은 언덕이 있는 곳’에 가을이 깊었다. 닫혀 출입할 수 없던 돈의문은 ‘돈의문 터’라는 팻말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의 서울 강북삼성병원과 경교장 앞 도로가 돈의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인왕산에 이르고 남쪽으로 이화학당(이화여고 전신)과 정동교회를 거쳐 숭례문(남대문)에 이른다. 그들 일행이 넘었던 성벽이 ‘언덕’이라는 것에 미뤄 현 돈의문박물관·서울시교육청·기상청 부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현재 기상청에서부터 북쪽으로 복원돼 공원화됐다.

이화학당 기숙사 학생들 취침 모습.

부부는 정동교회 인근에 집을 구해 사역을 시작했다. 동학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에 도성 안이 소란스러웠다. 매티는 의료선교사 홀 박사 부부를 도우며 한국어를 배웠다. 부임지 평양(1896년 10월 부임)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여성병원(보구여관)에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코와 손가락이 잘린 여성이 입원해 있다.… 흔히 벌어지는 정죄라고 한다.… 한국에는 진실한 남자가 거의 없다.’(1893년 10월 10일)

‘총소리에 잠을 깼다. 일본인들이 궁궐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고… 결국 일본인들의 손에 궁궐이 넘어갔다.… 전쟁이 일어나면 폭도가 생길 수 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나는 아기와 우리 옷가지들을 여행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1894년 7월 23일)

‘홀 박사가 24일 (발진티푸스로) 영면했다.… 그는 남편에게 “어린 양의 피로 닦인 문을 열고 들어가겠네”라고 말했다.’(1894년 11월 26일)

매티 선교사(맨 오른쪽)와 가족. 왼쪽이 남편 아서 선교사다. 7남매를 두었으나 2명이 풍토병 등으로 평양에서 숨졌다.

평양에 부임한 부부는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펼쳤다. 한국 최초의 유년주일학교와 여성성경공부 모임이 매티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그 평양에서 둘째와 셋째가 병사해 그곳에 묻어야 했다. 큰딸 루스(1894~1986)도 열병으로 고생했고 자신도 말라리아 열병으로 사경을 헤맸다. “낙담할 까닭이 무엇인가. 주님 하시는 일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매티는 이렇게 기도했다.

1906년 6월 황해도 재령 강가에서 자세를 취한 매티.

매티는 평양에서 1905년 러일전쟁을 겪었고 그 불바다를 겪고 일어난 현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회를 통해 3000명 이상의 영혼을 제단 앞으로 이끌었다. 한국교회가 합심한 결과였다.

그리고 1912년 3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아 평양, 중국 선양,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 런던에 닿았다. 고향으로 가기 위해 런던에서 타이태닉호 승선을 앞두고 있었다. 한데 동행한 프라이 선교사가 선양에서 트렁크를 분실했다. 그 가방을 수소문하느라 타이태닉호를 놓쳤다. 매티는 3월 19일자 일기에 ‘타이태닉호 대신 모리타니아호를 타고 (미국으로) 올 수 있었다. 타이태닉호는 다음 날 침몰했다’고 담담히 적었다.

엄마의 사역 이은 큰딸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바로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인 양 설교 예화로 강조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매티 부부가 “타이태닉호를 타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로 포장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매티 부부는 평양 선교 이후 수원종로교회를 중심으로 경기 남부와 강원도 선교에 힘썼다.

1913년부터 1934년까지 매티는 서울 수원 이천 원주 강릉의 북감리회 책임자 남편과 함께 일했다. 1919년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에서 그 참담함을 생생히 기록해 두기도 했다. 제암리 학살 현장에서 남편이 총살당한 뒤 탈출한 한 여인이 성벽 아래 숨어 있다가 헌병대에 발각돼 목이 잘려나간 만행을 매티는 일기로 전했다. 3·1운동 현장을 담은 매티의 일기는 한국근대사의 국가지정문화재급이다.

일제가 일본인에게 조선 여행을 권장하며 만든 엽서의 돈의문.

1918년 무너진 돈의문 옛터. 딸 루스가 아펜젤러의 아들 헨리 다지와 결혼해 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루스는 독립문 너머 은평천사원에서 6·25전쟁 고아 등을 보살피며 어머니의 사역을 이어갔다. 그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헐려 복원이 요원하다.

서울 경교장 앞 돈의문 터.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을 이유로 헐렸다.

글·사진=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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