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고 있는 글의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은 새벽 1시20분. 오늘 오전 중에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난 이제 겨우 첫 문장을 적었다. 10년 가까이 글 쓰는 직업을 하고 있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부담스럽고 어려운 행위다. 그래서 출판은 쓸 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버스기사나 식당 주인, 콜센터 직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을 찾아보기 힘든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쓸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쌓이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서점에 나온 자서전은 온통 대통령, 국회의원, 판·검사, 연예인 같은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건 기록되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기록에 격차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기록되지 않는 것들의 가치가 더 보잘것없게 느껴질 수 있다. 이건 비단 출판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적잖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 기사를 썼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루기 어려웠다. 집 앞 편의점 아저씨, 세탁소 아줌마, 택배 기사, 꽃집 누나의 삶은 ‘잘나가는 사람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들 사연 없이 살고 있어서일까.

이런 생각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책 한 권을 읽었다. 건설현장에서 노동하는 아버지에 대한 책이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임희정이 쓴 신간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수오서재). 아버지의 노동의 역사를 딸의 시선으로 절절하게 담아냈다.

책엔 논픽션 작가 은유가 임희정의 글을 읽은 뒤 느낀 감상이 나오는데 난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세상에는 가진 자, 배운 자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글도 유포되어야 하는데, 노동자는 노동하느라 바빠 기록할 수가 없는데 딸이 이렇게 증언해주니 고맙습니다.”

딸이 증언한 아버지의 삶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노동했다. 매일 새벽 4시30분, 지방에 갈 때는 3시10분에 집을 나와 공사장으로 향했다. 주택을 짓고 아파트를 세웠다. 하루는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얼굴 광대뼈 부위가 주저앉았다. 몇 달씩 지방에 내려가 여인숙에 묵으며 일한 적도 있다. 노동, 밥, 잠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반복은 50년 넘게 계속됐다. 그렇게 자식 3명을 키워냈고, 막내딸은 아나운서가 됐다. 임희정은 아버지에 대해 기록하며 그 삶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책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키워낸 부모의 생,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삶을 대충 살지 않았는데 노동을 막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하루하루 목숨 걸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일을 막노동이라고 불렀다. 딸은 그게 창피해서 아버지를 감추며 살았다. 부모가 부정될까 봐 그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겨우 글로 적었다.

최근 서울 서교동 카페에서 만난 임희정은 “글을 쓴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글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나도 부모를 숨겨 왔다”는 메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거나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거나 건설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아버지의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특별할 것 없어서 특별한, 대단할 것 없어서 대단한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위안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기록돼야 하는 이유다.

여전히 우리 사회엔 노동은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임희정은 글을 다 써놓고도 출판을 망설였다. 누군가는 변변찮다고 평가할지 모를 부모의 삶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게 부모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다. 주눅 든 딸이 부모에게 물었다. “책 낼 때 엄마랑 아빠랑 나랑 셋이 찍은 사진 그거 올려도 돼?” “괜찮아! 암시롱 안 해!” 자신들의 직업이, 삶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는 증명이었다.

가난과 무지는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원망도 창피함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으면 사회는 그들을 더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약자들의 이야기는 더 적극적으로 기록돼야 한다. 꺼내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기어코 끄집어냈을 때 손뼉 쳐주고 독려해줄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용상 뉴미디어팀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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