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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태원준] 톨레랑스의 새로운 적용


프랑스어 톨레랑스(tolerance)는 주로 ‘관용’이라 번역된다.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용인하는 것,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여러 민족이 어우러져야 하기에 다양성을 중시하는 유럽에서 확립된 개념이다. 내가 볼 때 분명히 틀린 짓인데 “그냥 다른 거야” 하면서 넘기려면 참아야 한다. 톨레랑스는 참는 것이다. 어원인 라틴어 tolerantia도 인내라는 뜻을 가졌다. 시작은 종교적 인내였다.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도의 살육을 정리하며 신앙도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한 프랑스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은 톨레랑스의 시발점이 됐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자유·평등·박애의 구호를 낳았고, 우리에게는 파업에 대처하는 프랑스인의 자세를 말해주는 용어로 친숙해졌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소.” 누군가 했다는 이 멋진 말은 톨레랑스 정신을 대표하는 수사로 여겨진다.

딱 거기까지, 우리는 알고 있다. 톨레랑스의 프랑스가 생각의 다름에 너그럽다는데 그 인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지난해 노란조끼 시위대를 두들겨 패는 경찰의 모습이 연일 전파를 탔다. 공립학교에서 무슬림의 히잡 착용을 앞장서서 법으로 금지했다. 2005년 교육 개혁에 반발한 고교생들이 학교를 점거했을 때 법원은 주동자에게 죄다 실형을 선고했다. 모두 ‘다른 생각’을 막아서고 금지하고 처벌한 거였다. 이런 조치를 그 사회는 역풍 없이 받아들였다. 파업할 권리를 인정하지만 폭력으로 변질되는 건 용인하지 않고, 종교적 관습도 공공의 이익에 반하면 과감히 제한하며, 법치의 질서를 관용의 미덕보다 앞세웠다. 이런 테두리 없이 톨레랑스가 무한정 적용됐다면 프랑스 사회는 아마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톨레랑스의 중요한 조건은 그 행동이 공동체가 용인하는 선을 지켰느냐에 있다. 엊그제 철도 파업이 시작됐다. 연간 1000억원 가까이 적자인 공기업에서 직원을 4600명이나 늘려 이틀 근무 이틀 휴무를 하겠다는 노조의 요구도, 지난해 교섭 때 이를 덥석 수용해준 사측의 행동도 이 선을 지켰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노사 의견을 다 배척하며 원점에서 재검토하려는 정부 입장이 관용의 조건을 충족한 듯하다. 그래서 ‘톨레랑스’를 발휘해보려 한다. 파업의 불편을 참아낼 테니, 결국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돌아올 코레일 노사의 행태를 정부는 끝까지 제어하기 바란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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