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 종로 LCK아레나에서 ‘2019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서머 스플릿 경기가 열리고 있다. 라이엇 게임즈 제공

한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는 아무런 사전 논의 없이 월급이 줄어드는 일을 겪었다. 그는 “첫 월급이 90만원 정도였는데 2달 만에 70만원, 나중에는 30만원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팀원과 연습생이 늘어날수록 입금액이 줄었다고 한다. 이 선수는 “대놓고 구단에 얘기하지는 못하고 월급에 대해 팀원들과 얘기를 한 적이 있다”며 “그런데 한 팀원은 ‘나는 안 줄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비교적 잘하는 친구였다”고 전했다. 구단이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월급을 임의로 깎아 지급했다는 얘기였다. 사전 협의는 전혀 없었다. 그는 또 “계약 전에 계약서를 면밀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당시 미성년자였다. 읽어봐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를 것 같았다”며 “좋아하는 게임을 하면서 돈을 받으니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프로게임단 측이 선수들을 통째로 ‘잘라버린’ 경우도 있었다. 한 구단은 최근 소속 선수들에게 “임금을 더 못 주겠으니 나가라”고 통보했다. 계약기간이 두 달가량 남은 상황이었다. 선수들이 임금 지급을 요구하자 구단 측은 “돈을 받고 싶으면 소송을 걸라”고 했다. 일부 선수들은 에이전시를 통해 법적 절차를 진행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구단이 계약서에 명시된 벌금 조항들을 전부 동원해 압박했기 때문이다. “남은 임금을 지급할 테니 계약서상 물어야 하는 벌금을 다 내라”는 식이었다. 선수들은 결국 남은 임금을 포기하고 팀을 떠났다.

언급한 사례는 ‘e스포츠 종주국’ 한국의 민낯이다. 국민일보는 e스포츠 관계자들을 심층 취재하고 일부 에이전시로부터 불공정 계약 사례집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불공정한 계약과 구단 측 횡포는 업계 도처에 널려 있었다. 프로게임단 그리핀 소속 LoL 게이머 ‘카나비’(게임상 닉네임) 서진혁(19)군의 ‘강압 이적 의혹’ 사건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린 프로게이머들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당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구단들이 계약 내용을 선수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수생활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는 현실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가족에게도 선뜻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봄 우리은행 후원으로 열린 대회 명칭은 ‘스무살우리 LCK Spring’이었다. e스포츠 팬들은 최근 불공정 계약 논란이 불거진 뒤 ‘스무살우리’를 ‘스무살노예’로 바꿔 부르고 있다. 지난해 기준 ‘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에 참여한 프로게이머 27.5%는 19세 이하 미성년자였으며 평균 연령은 20.8세에 불과했다.


갑자기 계약 조건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한 LoL 프로게이머는 최근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위해 구단 측과 접촉했는데 계약 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늘어나 있었다. 구단 측은 “1년을 고집하면 다른 조건을 불리하게 바꾸겠다”고 협박했다. 해당 선수는 새롭게 다른 구단을 접촉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부당한 결정에 따라야 했다. 한 프로게임 구단 관계자는 “구단에 잘 보여야 주전으로 기용될 수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끝까지 항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월급을 점점 줄여놓은 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꼬셔 해외 이적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며 “이적료로 구단은 돈을 벌게 되지만 선수는 해외에서 임금체불 등의 문제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른 에이전시 관계자는 “원래 자유계약 과정에서 에이전트 수수료는 한 번만 발생한다”며 “몇몇 에이전트는 선수들을 속여 매년 수수료를 떼어 가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국내 최대 리그인 LoL과 비교해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등 규모가 작은 종목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오버워치 프로게이머 중에는 ‘카나비’ 같은 불공정 계약 사례가 최소 30명은 될 것”이라고 털어놨다. 국내에는 2017년 기준 19개 종목 86개 대회가 운영되고 있다. 한 전직 오버워치 구단 관계자는 “급여를 후려치는 문제가 제일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작은 리그라도 수년간 프로생활을 했으면 100만원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것도 없는 선수가 많았다”며 “급여에서 교통비, 통신비를 내면 남는 게 없다. 그런 수준의 급여를 지급하는 팀이 80%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처우에 팀을 떠나려고 해도 위약금이 발목을 잡는다. 이 관계자는 “계약 해지 위약금이 1000만원을 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버워치 팀의 불공정 계약 문제는 2016년 10월 한 차례 불거진 적이 있다. 당시 오버워치 팀 마이티스톰은 ‘선수 일방 계약 파기 시 프로활동 금지 및 직간접 투자 비용 2배 지급’ ‘비밀유지 서약 위반 시 2000만원 즉시 배상’ 등 불공정 조항을 선수 계약서에 포함시켜 논란이 됐다. 당시 협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선수 권익에 반하는 상황”이라며 “강력한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3년 뒤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e스포츠계의 불공정 계약이 뿌리 깊은 관행이라고 말한다. 20년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게임을 하고 돈을 받는 개념이 생소했던 게 사실이다. 게임도 하고 돈도 주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식이었다. 2017년 기준 e스포츠산업 규모가 1000억원에 달하는 등 시장이 커지고 팬층도 두터워졌지만 선수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 더뎠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처우나 계약서 내용이 초창기 e스포츠 질서에 맞춰져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구단 측이 선수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아이’로 본다. 팀 운영이나 계약서에 그런 관점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말했다.

불공정 관행에 대한 e스포츠 팬들의 분노는 뜨겁다. ‘카나비 사태’와 관련한 재조사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27일 20만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 답변 대상이 됐다. 청원이 시작된 지 1주일 만이다. 아울러 e스포츠 구단 계약서를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새로운 청원도 이날 게시됐다.

한국법조인협회 e스포츠연구회 소속 윤현석 변호사는 “e스포츠계에는 국가기관이나 공신력 있는 단체가 만든 규약 등 법제화된 부분이 없다”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최소한 표준계약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후진적 시스템으로는 세계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부처는 불공정 계약 문제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고 시정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동성 윤민섭 이다니엘 정진영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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