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2400여명, 고아들의 아버지는 기쁘게 ‘여관’을 떠났다

미국 남장로회가 조선에 파견한 오긍선 선교사와 서울 구기·청운동

서울 구기동 청운양로원 늦가을 텃밭과 벤치 풍경. 일제강점기 그리스도인 오긍선 박사가 운영했던 이 양로원은 1980년대까지 예배가 이어졌다. 1960년 서울 청운동에서 이곳 구기동으로 이전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구기동 청운양로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광화문과 자하문터널을 지나는 버스를 탔으나 버스 기사는 광화문 광장 못 미쳐 유턴한다고 승객에게 알렸다.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고 서북부 불광역에 내려 거꾸로 접근해야 했다. 청와대 앞 노조의 시위 때문이었다. 이튿날 주일에는 서울 청운동 옛 청운양로원 터를 찾았다. 이번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기독교 보수단체 집회가 진행돼 접근이 쉽지 않았다. 내려 걷는 수밖에 없었다.

청운양로원은 1927년 청운동에서 경성양로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이원직이라는 여성 불교도가 세웠다. 그러나 운영난으로 1933년 기독교계가 인수를 하는데 그 대표자가 의사이자 경성보육원 설립자인 오긍선이었다. 이 분야 연구자 정상양(광주대) 교수에 따르면 “청운양로원은 우리나라 첫 양로원이자 여성 전용 양로원으로 그 첫 수용자가 대한제국 궁녀들이었다”고 한다. 근대여성 미술가 나혜석(1896~1948)이 불우한 말년을 이 양로원에서 지내다 숨졌다.

오긍선 (1878~1963)

예배가 드려지던 첫 근대양로원

해관 오긍선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배재학당과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배재학당 재학 중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가입,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코자 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를 미국 프린스턴과 컬럼비아 의대를 나온 조선 선교사 존 알렉산더(1875~1929)가 눈여겨봤고 그의 미국 유학을 주선했다. 1902년 도미한 오긍선은 켄터키주 센트럴대학과 루이빌의대를 졸업하고 서재필에 이은 2호 조선인 의학박사가 된다. 조선의 첫 피부과 전문의였다.

의료선교사 오긍선이 섬겼던 군산 구암교회 초기 모습. 유리건판 사진.

오긍선은 루이빌의대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 미국 남장로회가 파송한 선교사로 금의환향한다. 미국 남장로회 조선선교부는 그 무렵 호남지역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선교 전진기지인 전북 군산에 야소병원을 설립했으나 의사가 없어 애를 먹고 있었다. 오긍선은 의료선교사로 군산에 당도해 광주와 목포 야소병원 일까지 겸했다. 유학 전 군산의 불(한국명 부위렴) 선교사의 통역을 해본 바 있던 오긍선이었다.

오긍선은 의료선교사들로부터 긍휼과 의료인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다. 그의 멘토 알렉산더는 군산과 순천 등지에 학교와 병원을 지을 때마다 선교비를 감당해 오긍선으로 하여금 청지기적 삶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이 영향으로 그는 군산 구암교회 예배당과 영명학교 건립에 참여한다.

경성보육원 시작 무렵의 남대문시장(칠패시장) 구걸 소년들과 오긍선 박사(오른쪽), 동역자 김병찬 장로(남대문교회).

1913년 오긍선은 남장로회 조선선교부 대표로 세브란스의전 병원에 파송된다. 이어 셰핑(서서평 1880~1934) 선교사도 이 병원 간호사로 파송됐다. 서서평은 ‘미국에서 온 어느 의료선교사보다 오긍선이 환자를 대하는 진찰 기록이 항상 세 배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더·오긍선 연구자 양국주(미국 기독NGO 서빙더네이션스) 대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오긍선의 긍휼은 끝이 없었다”며 “1918년 기독 청년들의 ‘토요구락부’ 조직, 1919년 ‘경성고아구제회 창립’ 등은 그의 실천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 무렵 오긍선은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김병찬 장로(남대문교회)에서 고아를 돌봤다.

세브란스의전 교장 에비슨(1860~1956) 선교사의 기록. ‘오긍선이 칠패시장(현 남대문시장)에 가면 구걸하는 어린이와 청년들이 그를 에워싸고 “아버지”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는 가난한 이웃을 내 몸같이 섬겼다.’

경성보육원 후신 안양 ‘좋은집’ 의 봄 풍경. 안양기독보육원으로도 불렸다.

1919년 서울 옥천동 언더우드 선교사 소유 대지에서 ‘경성보육원’이 법인 형태로 출발했다. 집에서의 자택 구제가 한계에 이르자 그가 윤치호 송택수 김광준 등과 뜻을 모아 보육원을 세웠다. 지금의 사회복지법인 해관재단 ‘좋은집’(안양시·1936년 이전)의 전신이다.

보육원을 세울 무렵 오긍선을 시험에 들게 한 일화가 있다. 서울의 미국인 소유 전차회사에서 영어 잘하는 조선 청년을 구하자 에비슨이 그에게 높은 봉급을 주는 회사로 옮기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긍선은 “그러면 선생님, 주일 성수를 하고 전도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봉급은 몇 배 더 많지만 일이 많아 예배 참석과 전도는 불가능하네”라고 답하자 “그렇다면 저는 박봉이라도 전도하고 성수가 가능한 이 자리에 머무르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의료선교사로 사는 삶에 최선을 다했다. 무료 진료 과정에서 청운양로원의 어려움을 알게 됐고 1933년 청운양로원을 인수, 소외 노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1980년대 신문 르포 기사에 ‘청운양로원이 예배로 일과의 처음과 끝을 맺는다’고 전한 것으로 보아 오긍선 등이 뿌렸던 복음의 씨앗이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양기독보육원 내 예배당. 1960년대 인기 결혼 예식 장소였다.

현 청운양로원은 구기동 이북오도 청사 뒤편 북한산 자락에 있다. 지금은 예배가 이뤄지지 않는 일반 사회복지법인이다. 오긍선은 금강 일대 이재민 구휼에 앞장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떻게든 양로원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늘어나는 보육원 고아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1936년 보육원의 안양 이전과 함께 양로원 운영에 손을 떼야 했다.

주일성수 못하는 회사 안 간다

오긍선은 1934년 세브란스의전 교장이 되면서 조선지원병제도축하회를 결성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등 친일행위를 했다. 학생 전원이 조선인 학생이었던 세브란스의전이 일제의 탄압으로 미국 교계로부터 후원이 막히자 학교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소극적 친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해방 후인 1949년 반민특위에 자수했고 심사 끝에 풀려났다. 이후 의료인보다 보육원 운영에 몰두한 그는 1962년 ‘소파상’을 수상했고 사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역파송된 의료선교사 오긍선. 그는 ‘거지 아버지’ ‘거지 대장’으로 불리는 1세대 사회사업가였다. 그가 7명의 아이와 함께한 보육원은 지금도 계속된다. 안양기독보육원은 6·25전쟁 때 80여명의 고아와 피난길에 올랐다가 수원에서 폭격을 당해 많은 아이를 잃었다. 부산에 도착하니 30여명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서울 청운동 청운양로원(흑백)과 같은 터의 현재 모습. 1960년대 청운양로원이 구기동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저택으로 사용됐다. 지금도 정씨일가 저택이다.

오늘날 서울 옥천동 옛 경성보육원 터는 아파트 및 상가로 개벽했다. 안양천 옆 삼성산 자락 이전 안양기독보육원(좋은집)은 아파트와 큰 도로에 포위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청운양로원 옛터는 1960년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팔려 지금은 정씨일가 저택이 됐다.

오긍선은 격동의 한국사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의 덕목을 보여준 인물이다. 한국 의학계도 여전히 심포지엄 등으로 그를 기린다. 다만,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선뜻 재평가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2400여명을 길러낸 고아의 아버지는 별세 전 이렇게 말했다.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아버지) 집으로 가네.”

글·사진=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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