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매우 추워졌다. 겨울 난방이 걱정이다. 요즘은 도시가스나 기름을 쓰지만, 옛날엔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연탄불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종종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그 연탄 한 장 값이 요즘 얼마인지 아는가? 약 800원이다. 하지만 달동네나 옥탑방 등에는 배달료가 더해진다. 그러면 장당 1000원에 육박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연탄을 ‘금탄’이라 부른다.

올해로 15년째 연탄 배달부로 일하는 정해창 목사는 연탄이 “이 시대 사회적 약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말한다. 즉 “그들의 가난과 추위, 아픔과 눈물의 상징”이다. 만약 연탄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뿌리는 ‘허(虛)의 정신’이다. ‘비어 있음’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연탄은 우리 시대 가장 낮고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다 태우고, 다 없애버려서 그들의 눈물과 아픔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유명한 시 ‘연탄 한 장’이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삶이란/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면/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생각하면/삶이란/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필자는 기억이 난다. 엄동설한, 눈 내려 미끄러운 빙판길 위엔 누군가 밤새 불타고 하얀 재가 된 연탄재를 깨트려 고마운 길을 내주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 태우고, 다 없애버려서 세상을 따뜻하게 덥히고 생명을 지키는 것이 연탄이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 연탄과 비슷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끝까지 낮추고, 완전히 비우고, 다 불살라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신, 연탄과 같은 분이다.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고 빈 것은 싫어한다. 그래서 빈 지갑, 빈 통장, 빈 곳간은 질색이다. 사람도 무일푼이면 어디 가도 대접 못 받는다. 이렇게 빈 것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은 허공까지 무시한다.

하지만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허공이야말로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공(絶代空)’이라고 했다.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피리는 속이 다 비어야 깊은 소리를 낸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렇게 자신을 다 비우고 허공이 되셨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찼다.

다시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고 하셨다.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고 하셨다. ‘대충’이 아니다. ‘미지근하게’가 아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다. 전 존재를 불살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은 이렇게 말했다.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 그렇다. 덤덤하고 냉정한 삶을 먼지처럼 사는 것보다, 아픔을 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생명을 뜨겁게 불태우며 사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삶일 것이다. 남은 한 달, 연탄처럼, 그렇게 뜨겁게 살아보면 어떨까.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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