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후임자 임명 거부로 오는 11일부터 무역 분쟁의
최종 판단 내리는 상소기구 작동 중단될 상황
더 큰 문제는 자유무역체제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확산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경제는 WTO 무력화에 더 취약할 것


세계무역기구(WTO)가 어려움에 부닥쳤다는 얘기가 나온 지는 꽤 됐다. 특히 2017년 1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은 WTO에 악몽의 시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다자간 협정을 통한 세계무역 자유화’라는 WTO의 목표에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회원국 합의에 따른 의사 결정’이라는 WTO의 원칙은 몽상일 뿐이다. 미국 철강업계를 대변하는 통상 변호사 출신인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WTO를 “국가 주권에 대한 위협”이라고 했다. 이들 반(反) WTO주의자들은 최강대국 미국의 힘을 무기로 상대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양자주의(bilateralism)를 선호한다.

1995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바통을 이어 WTO가 출범했다. 내년 1월 25주년을 맞는 WTO 역사에서 오는 11일은 중대한 전환점이다. 무역 분쟁의 최종 판단을 내리는 WTO 상소기구(Appellate Body)가 작동을 중단한다. WTO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은 무역자유화 협상의 마당을 제공하는 일과 체결된 무역협정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일, 즉 분쟁해결 절차의 역할이다. 전자인 무역자유화 협상은 도하 라운드 실패로 중단됐다. WTO의 마지막 남은 주요 기능이 분쟁해결 절차인데, 이마저도 사실상 마비되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 심판이 없는 꼴이다.

7명으로 구성되는 상소기구의 위원은 현재 3명만 남았다. 상소기구 위원이 공석이 될 때마다 트럼프 행정부가 후임자 임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상소기구의 판결이 편파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은 10일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3명 중 2명의 임기 연장도 거부했다. 상소기구의 재판부는 최소 3명으로 구성돼야 하는 까닭에 1명만 남게 되는 11일부터 재판 진행은 불가능해진다. 미국의 상소위원 임명 거부가 트럼프 행정부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도 미국에 불리한 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2016년 5월 당시 장승화 위원(서울대 교수) 연임을 거부한 적이 있다. 하지만 WTO 존폐 우려가 나올 정도로 사태를 끌고 가고 있는 건 트럼프 행정부가 처음이다.

앞으로 WTO는 어떻게 되나. 미국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리지만, 미국이 WTO의 붕괴를 원하진 않는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국의 이해를 관철하는 데 WTO는 여전히 유용한 틀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상소기구 마비를 지렛대로 작게는 미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분쟁해결 절차, 크게는 중국 등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근절할 WTO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할 것이다.

WTO 상소기구 정상화를 위한 협상은 주고받기가 아니라 미국의 요구에 나머지 회원국들이 예스(yes)냐 노(no)냐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는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반면 WTO의 마비가 수년간 계속되거나, 트럼프가 양자 협상을 통해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는 걸 알게 된 까닭에 WTO는 이름만 남은 ‘식물 기구’가 될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상소기구가 조기 정상화되든 빈사 상태가 지속되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WTO체제로 대표되는 자유무역체제에 대한 불신의 확산이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 행정부에서 USTR 대표였던 칼라 힐스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국제무역에서 법치 대신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게 됐다”고 탄식했다. 상소기구가 재가동하더라도 미국 중국 등의 압력에서 상소위원들이 자유로운 판결을 내릴지 의문이다. 분쟁해결 절차의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미국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WTO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트럼프는 올해 초 “그들은 수년 동안 우리를 엿먹여(screw)왔다. 해야 한다면 우리는 WTO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가 진단한 대로 ‘우리가 알던 WTO는 끝났다’는 게 맞는다.

WTO체제가 무력화되면 이미 미·중 무역 갈등의 파장에 허덕이는 세계 무역은 추가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WTO체제 출범 한 해 전인 1994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무역의 비중은 41%였다. 이 수치가 2017년에 58%로 상승했다. 여기에는 규칙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WTO체제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상품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는 WTO 무력화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자유무역협정(FTA) 몇 개 더한다고 파장을 이겨낼지 의문이다. 세계 경제의 판이 흔들린다면 우리의 대응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수출주도 성장을 벗어나 내수 비중을 늘리겠다는 이번 정부의 방향은 맞았다. 그렇지만 이론도, 정책 수단도 잘못된 소득주도성장에 과도한 자원을 투입한 것이 뼈아프다. 성장 동력은커녕 한국 경제에 짐이 된 것을 이제 누가 부인할 수 있나.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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