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개 삶과 직업이 분리되지 않는다. 오후 6시까지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저녁에는 탱고를 배우며 ‘다른 저녁이 있는 삶’을 살거나 공인중개사 준비를 하며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식의 분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창작자는 그가 하는 일은 물론 보는 것, 듣는 것, 쉬는 것 모두가 창작의 일부분이다.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목수로서의 삶과 김윤관이라는 사적 존재로서의 일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이름은 다섯 자, ‘목수 김윤관’이다.

직업이 삶과 구별되지는 않는 경험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삶은 미션(mission·임무)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미션을 띠고 태어난 사람도 아닐 뿐더러 베스트셀러 가구나 디자인사에 기록될 명작을 만드는 미션을 바라며 작업을 하지도 않는다.

의식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스무 살 시절에는 내가 이 시대, 이 공간에 태어난 것에는 어떤 이유와 사명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목수가 된 후에는 장 프루베의 ‘스탠다드 체어’에 필적할 만한 가구를 만드는 게 나의 목표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대와 30대는 놀라울 정도로 텅 빈 속내와 시간으로 사라져버렸고, 목수로서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스탠다드 체어는커녕 스탠다드한 목수라도 된 것인가 의심스럽다.

목공을 마치고 공방에 앉아 등을 끈 후 빔프로젝터를 켜고 영화 ‘007 시리즈’를 본다.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시쳇말로 ‘개고생’을 한다. 갖은 고생 끝에 임무를 마무리한 그는 미인의 허리를 안고 멋진 미소를 날리며 스크린 너머로 사라진다. 하지만 리모컨 한 번 더 누르면 그는 다시 이전 편보다 더한 미션을 부여받고 이전 편보다 더한 ‘개고생’을 치른다. 남의 고생 구경, 싸움 구경을 실컷 한 다음 불을 켜면 007의 세계와 달리 나무와 공구, 톱밥으로 가득한 공방이다.

허구와 현실 사이의 극단적 전환을 경험한 나는 문득 깨닫는다. 아, 내 삶, 내 직업에는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특별한 미션 따위는 없는 거구나. 아니,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007처럼 미션을 부여받고, 미션을 마무리하고, 다음 미션으로 넘어가는 그런 극적 분리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일반적인 예를 든다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부장으로 승진만 하면, 집만 마련하면, 아이만 크면, 은퇴만 하면…. 그럼 하나의 미션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그 후에는 더 멋진 미션과 삶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어떤 성취를 이루든, 어떤 실패를 겪든 삶이란 여전히, 별다른 것 없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어진다. 어쩌면 삶이란 ‘미션’이 아니라 ‘관성’과 ‘루틴’에 단단히 뿌리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한 점의 가구를 만들거나 전시를 준비할 때 전처럼 극단적인 결심이나 열정을 의도하지 않는다. 이 가구나 전시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는 별다른 차이 없이 여전히 김윤관일 것이고 목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가구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다음 날부터 나는 또 가구를 만들어야 하고, 아무리 성공적인 전시를 치러도 그다음 해에는 다시 전시를 해야 한다. 007처럼 미션을 치르다가는 영화와 달리 성공 후에도 장기 입원이 분명하다. 더구나 특수요원 007마저 그 힘든 미션을 거듭하고도 은퇴는커녕 더더욱 힘든 미션을 24번째나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25번째 미션을 치르고 있다는 제임스 본드를 보면 미션이란 기본적으로 임파서블(impossible·불가능)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되 못 마치면 미룬다. 어차피 나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고, 내일도 작업복을 입고 목공을 할 것이니까.

연말이다. 엑셀을 열고 올해 마무리해야 할 일과 내년으로 미룰 일을 정리하다가 문득, 저장도 안 한 채 노트북을 덮는다. 그저 5월이나 9월의 어느 날처럼 특별한 구분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일을 하고, 마무리되면 마무리된 채로 마무리 안 된 일은 마무리 안 된 채로 내년으로 넘길 생각이다. 어차피 미션도 아닌 삶일 뿐이니까. 퇴근길에 바에 들러 보드카 마티니나 한잔해야겠다. 흔들지 말고, 저어서.

김윤관(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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