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설의 문화산책] 밥솥에 그린 어머니의 십자가


나의 어머니는 밥을 지을 때마다 밥솥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으로 십자가를 그렸는지 여쭈어보지 않아 의미를 모른다. 그런데 아내도 어머니와 약속을 한 듯 밥이 되고 나면 밥솥에 십자가를 그린다. 어머니가 그렸던 십자가를 신세대 주부인 아내도 따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다 해도 아내까지 밥솥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의외였다. 어머니와 아내는 신앙 정서가 같은 한국 여성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은 밥솥에 십자가를 그린 문화를 소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신앙의 표현은 어디에서 온 것이고 누구에게 배운 것일까? 한국인의 무속적 심성으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나타낸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한국의 여인들은 장을 담을 때도 해 뜨는 동쪽을 향해서 절을 했다. 새벽에 길은 맑고 정한 우물물인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소원을 빌었다. 소원성취를 위해 정성을 다했던 여인의 심성으로 밥솥에 그린 십자가를 이해할 뿐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절기와 관련된 음식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보았다. 성탄절 주간에 금식은 안 했으나 성탄절 전날 하루는 엄격하게 금식을 했다. 성탄절 기간에는 간단하게 빵을 먹었고, 성탄절 전야에는 하늘의 첫 별이 나타난 후에야 식탁에 앉는다고 한다. 유대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께 예물을 가지고 온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이들의 절기 음식은 여러 가지 신앙의 동기와 이유로 전통음식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역사가 짧아서 그렇겠지만 절기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 없어 아쉽다. 미신 같지만 밥솥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한국교회만의 신앙 정서이다.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박해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벽에다 물고기 한 마리를 그려놓고 바라봄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신앙을 고백했다. 밥솥에 그린 십자가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쌀이 밥이 되는 과정에 나타난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나눔을 생각해 보자. 쌀은 밥이 되기 위해 변형이라는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밥솥에 뜨거운 열이 가해지면 단단한 쌀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부드러운 밥으로 모양이 바뀐다. 이렇게 만들어진 밥은 우리 몸의 영양소가 되기 위해 다시 한번 분해되어 육체의 에너지가 된다. 밥솥에 그린 어머니의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어머니는 아침과 저녁마다 밥솥에 그린 십자가로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 어머니는 미신과 같은 행위로 자신의 십자가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식탁에 놓인 밥을 뜨는 순간에 십자가의 변형과 희생을 체험한다. 사람은 십자가의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육체의 에너지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강림절기에 무익한 일로 십자가의 변형과 희생을 헛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영설 여주 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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