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의 개봉 영화 출연작은 34편이다. 주연이거나 비중 있는 조연일 때 그렇고, 출연작만 따지자면 40편이 훌쩍 넘는다. 영화 ‘쉬리’의 특별조사관 역이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을 ‘장군의 아들’ 단역이 그렇다. 지금껏 이 지면에서 다뤘던 많은 배우들이 스타이자 배우였다면 황정민은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다는 점에서 많은 스타-배우들과는 다르다. 연극과 뮤지컬 등 무대에서부터 시작해 단역, 조역을 거쳐 주연이 된, 말하자면 교과서적인 배우로서의 성장 과정을 거쳐 온 셈이다.

교과서적이라는 말은 이상적이지만 힘든 과정을 뜻한다. 많은 배우들이 이 길고 지겨운 과정 가운데서 누락돼 결국 사라져갔다. 특히 연극 무대에서 실력을 다진 연기파 배우들이 인상 깊은 조연배우에서 주연배우로 홀로서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개성 있는 얼굴과 탄탄한 발성, 주목을 끄는 연기력을 갖춘 실력파 배우들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이자 든든한 지지기반이다. 하지만 주연이란 단순히 배우로서의 실력, 연기력으로만 평가받는 자리는 아니다. 흥행 성과에 있어서 주연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영화 구성원 중 한 명이다.

그런 점에서, 황정민은 연기력에 대한 평가와 흥행성 및 대중성 평가 모두에서 합격점을 받은 배우이다. 흥미로운 것은 송강호 하면 봉준호가 떠오르듯이 황정민이 특정한 감독과 시너지를 나누며 성장한 페르소나 유형의 배우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바람난 가족’ 같은 독특한 작가주의 영화에서부터 ‘국제시장’과 같은 최루성 대중 가족 멜로 영화까지 모두 등장했던 필모그래피에서도 확인된다. 자기만의 연기 세계를 가진 1000만 배우, ‘국제시장’(2014)과 ‘베테랑’(2015) 두 편이나 되는 1000만 영화를 가진 배우, 그가 바로 황정민이다.

순박하면서 거친

단역 혹은 눈에 띄지 않던 조연이었던 황정민이 영화계에 각인된 작품은 바로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작품을 보며, 새삼스레 임순례 감독의 뚝심 있는 연출력에 감탄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영화 곳곳에 얼굴을 내미는 훌륭한 배우들의 몫이 크다. 고속도로에서 짬뽕 트로트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주진모, 어린 시절 성우(이얼)를 연기하는 박해일, 바람둥이 키보디스트 정석(박원상), 노랑머리 웨이터 류승범 등 가까운 미래, 한국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 될 인물들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채워주고 있다. 수더분한 편집과 무덤덤한 카메라워크 가운데서 인물들은 영화처럼 호들갑 떨지도 그렇다고 너무 편협하지도 않은 삶의 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 바로 드럼 연주자 강수, 황정민이 있다.

황정민이 연기한 강수는 말하자면 촌놈이다. 무대 위 밴드의 일원이자 드럼 연주자로서 소년 시절 가졌던 꿈을 간직한 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도 그렇다고 재빠르게 타협하지도 못하는, 그런 촌놈 말이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쭈뼛거리는 그는 나이답지 않게 순진하다. 그렇게 공들이던 여자를 바람둥이 키보디스트가 뺏어가자 그는 고작 술이나 진탕 먹고 행패나 부린다. 밴드 안에서 악보로 세상을 배운, 순박하고 거친 인물 강수가 황정민의 연기를 통해 재현된다.

영화 ‘너는 내 운명’

어떤 점에서 황정민의 연기는 이 순박함과 거침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내 운명’(박진표·2005)의 김석중이 순박함의 한끝이라면 거침의 끝에는 ‘아수라’(김성수·2016)의 정치인 박성배가 있다.

에이즈 감염자이자 유흥업소 직원이었던 여자를 무턱대고 사랑하는 순정은 맹목에서 비롯된다. 한편, 사람들 앞에서 속옷까지 벗어던지며 안하무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탐욕을 채우는 정치인 박성배는 거침과 더러움의 끝에 놓여 있다. 순박함의 절대성 가운데에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고 말하는 정직한 경찰(‘베테랑’)이 있고, 순정한 법치주의자인 검사 변재욱(‘검사외전’)이 있다. ‘국제시장’(윤제균)의 덕수나 산이 있으니 올라가야만 하는 엄홍길(‘히말라야’)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묵묵하게 한 길만 보고 가는 순박함, 그게 황정민의 세계 중 하나이다.

황정민이 로맨스 영화에서 종종 주연을 맡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엄정화와 함께 주연한 ‘댄싱퀸’(이석훈·2012)에서 황정민은 선한 의지가 통하는 세상을 꿈꾸는 신인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행복’(허진호·2007)의 영수나 ‘남자가 사랑할 때’(한동욱·2014)의 태일 역시 이 스펙트럼 가운데 있다. 영수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갈 때엔 한 여자만 사랑하다가 이내 병이 낫자 다른 여자를 전전하는 그렇고 그런 남자로 등장한다. 순정을 바치는 시한부 연애에서 파렴치한의 사랑까지가 ‘행복’이라면 반대로 ‘남자가 사랑할 때’는 불량배였으나 사랑을 통해 순정을 아는 다른 남자로 바뀌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정반대이지만 황정민은 이 정반대의 흐름을 모두 담아낼 만한 얼굴이다. 나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평범해 보인다.

영화 ‘사생결단’
영화 ‘신세계’

누아르의 그림자

아무리 1000만 영화라고 해도, 황정민의 대표적 이미지는 바로 누아르다. 잭나이프를 휘두르며 아이스링크의 얼음판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야비하고 볼품없는 깡패. 바로 영화 ‘달콤한 인생’(김지운·2005)의 백 사장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백 사장은 황정민이 우정 출연했던 역할이다. 그런데, ‘달콤한 인생’은 그가 출연했던 수많은 영화 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이 남는 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아수라’의 부패한 정치인, ‘사생결단’(최호·2006)의 마약 전담 수사 경찰, ‘신세계’(박훈정·2012)의 정청에 이르기까지 황정민의 얼굴에는 누아르의 짙은 그림자가 어려 있다.

황정민은 선이 굵다기보다 빛과 어두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얼굴이다. 선과 악이 잘 가늠되지 않는 ‘부당거래’(류승완·2010) 속 캐릭터나 ‘신세계’의 정청이 누아르 세계를 이미지로 전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아르는 범죄라는 소재도 중요하지만 빛과 어두움, 그 대조 가운데 놓여 있는 인간 군상의 얼굴이 이미지로 육박하는 장르이다. 그런 점에서 황정민의 얼굴은 그 자체로 누아르적이다.

영화 ‘곡성’

이 누아르의 그림자가 공포나 스릴러와 만났을 때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바로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의 일광이다. 공포인지 미스터리인지 스릴러인지 구분하기 힘든 격정적 긴장 가운데서 그 비밀의 핵심을 일광이 운반한다. 무당인지, 악마인지, 아니면 그 중계자이거나 그 자체인지 모호한 가운데 그는 공포와 긴장의 에너지를 쓸어 담아 한 판 굿을 풀어낸다. 닭피가 흐트러지고, 꽹과리와 북의 파열음이 흩어질 때, 황정민은 배우라기보다 빙의된 영혼처럼 스크린을 장악한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바짝 뒤로 넘긴 머리를 한 일광은 영화의 상징적 감정을 단숨에 끌고 간다. 영화의 긴장이 최고조가 되는 순간에 바로 그, 황정민이 있는 것이다. 어둠 속에 더 빛나는 힘, 황정민은 그런 누아르의 힘을 가진 배우이다.

영화 ‘공작’

침묵 속의 약속을 건네는 배우

그중에서도 윤종빈 감독의 영화 ‘공작’(2018)은 배우 황정민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임에 분명하다. ‘공작’의 흑금성은 지금껏 황정민이 거쳐 왔던 모든 이미지와 매력, 힘이 다 응축돼 있다. 한국 정부의 스파이이자 사업가이면서 북한의 고위직과 우정을 나누는 이 은밀하고도 복잡다단한 캐릭터는 황정민을 통해 입체화된다. 흑금성은 가정적이면서도 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치밀하며, 이기적이지만 타인을 존중한다.

정체성을 숨기면서도 한편 약속을 얻어내야 하는 흑금성은 비언어의 세계 안에서 신뢰를 쌓아간다. 그리고 이 아우라를 황정민이 이성민과의 호흡을 통해 만들어낸다.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건네는 약속, 그 뭉클한 ‘브로맨스’가 황정민의 걸음, 눈빛, 입가의 미소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공작’의 흑금성은 한동안 지나치게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영화에 치중되었던 황정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우려를 털어버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밋밋하고 평범한 시민만을 연기하기엔 황정민은 넓고, 깊다. 그 넓고, 깊은 연기, ‘공작’ 이후 또 다른 내공의 세계를 보여줄 황정민을 기대해본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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