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걸출한 연기력으로 매 작품 흥행을 이끈 배우 이정은. 성실한 작품 활동으로 잘 알려진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동안 푹 쉬면서 가족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다. 최현규 기자

2019년 ‘올해의 연기자’를 뽑는다면 이 배우가 빠질 리 없다. ‘다작’으로 꾸준히 팬들과 만났고, 작품마다 걸출한 연기력을 보여줬으며, 고로 매번 흥행의 끌차가 됐다. 20여년의 긴 무명을 끝내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이 배우의 이름은 이정은(49). 2019년 가장 뜻깊은 발견이었다.

1991년 연극으로 데뷔한 이정은은 2000년 즈음부터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해 지금껏 약 60여편의 작품을 거쳤다. 조연으로 주로 출연했는데, 그의 절륜함이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탄 건 지난해부터였다. 그를 강렬하게 각인한 작품은 김은숙 작가의 ‘미스터 션샤인’. 이정은은 일제에 불을 뿜는 총구로 맞선 고애신(김태리)을 애면글면 살피는 가노(家奴) 함안댁에 녹아들었다.

예열을 마친 그에게 2019년은 도약의 해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 영화 ‘기생충’을 연이어 히트시켰다. 특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딸 동백(공효진)을 버린 죄책감에 사무친 정숙의 모성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흥행을 견인했다. 실제론 싱글인 이정은은 최근 인터뷰에서 “다정다감하고 용기 있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모티브로 삼아 다듬어나갔다”고 전했다. 그의 영민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정은이 올해 출연한 작품들. 위쪽부터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 ‘타인은 지옥이다’(OCN) ‘동백꽃 필 무렵’(KBS2), 영화 ‘기생충’. 방송화면 캡처,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건 그가 50대를 앞둔 이 시점에도 여전히 변신을 거듭하는 배우란 점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그동안 무대에서 쌓아온 연기자로서의 내공이 드러난 한 해였다”며 이정은을 “변신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 배우”라고 치켜세웠다. 윤석진 드라마평론가는 “작품 선구안도 있지만, 조금씩 결을 달리하는 캐릭터 선택에서 그의 영리함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그간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을 주로 소화해왔던 그는 올해를 기점으로 ‘스릴러’라는 새 얼굴을 얻었다. 그중 특기해야 하는 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진흙 같은 계급적 폐쇄성을 그린 영화에서 그는 가정부 문광을 처연하고도 오싹하게 풀어내며 박수받았다. 영화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지하에 갇힌 남편을 돌보는 의뭉스러운 문광이란 인물에게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문광은 이정은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프리즘이면서, 엄마나 이모 등 중년 배우에게 으레 강요되곤 했던 배역 고정관념에 대한 경종이기도 했다. 최근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높이 들어 올린 그는 “기생충에선 숨겨진 자아가 튀어나온 느낌이었다”며 “내가 그런 얼굴을 지녔다는 게 지금도 신기하게 느껴지곤 한다”고 전했다. 고시원 속 의문의 살인사건을 그린 타인은 지옥이다의 고시원 주인 엄복순은 이런 행보에 쐐기를 박는 캐릭터였다.

이정은은 1987년 민주항쟁을 계기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에게 연극이 메시지를 던지는 일종의 사회적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진학 후 무대에 오르며 한 해 동안 손에 쥐었던 돈은 20만원가량. 40세까지 녹즙 판매원, 채소 장사 등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고된 생활을 이어갔지만, 늘 꿈을 좇았다. 이정은은 이 기간을 “헛되지 않았다. 돌아보면 배우의 얼굴이 만들어지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성실한 ‘다작’으로 유명한 이정은의 행보에서 유일하게 걱정되는 부분을 꼽는다면 이미지 소비에 관한 것이겠다. 공 평론가는 “속도 조절도 물론 중요하다. 다만 무대에서 축적된 잠재력이 대단한 만큼 다양한 모습을 내보이며 장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정은이 가진 배우로서의 신념은 무엇일까. 그에게 삶의 철학과 연기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정은은 “출중한 후배들이 정말 많다. 그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손뼉 쳐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처럼 삶에서도 누군가의 힘이 되는 길을 걷고 싶다는 뜻이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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