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명이 촛불 들면 대한민국이 바뀐다”

[책과 길] 관계의 과학/김범준 지음, 동아시아, 344쪽, 1만5000원

시민들이 2016년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에 항의하는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 당시 한 학자는 집회 사진을 분석, 촛불의 개수를 파악해 참가자를 86만~129만명 수준으로 추정했다. 한데 김범준 교수는 촛불을 들진 않았지만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도 주목한다. 그는 이들 시민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암흑물질’과 비슷한 존재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국민일보DB

“물리학자도 세상을 본다.” 저자의 전작인 ‘세상물정의 물리학’(2015)에도, 그의 신작인 ‘관계의 과학’에도 모두 등장하는 문장이다. 저자의 대중 교양서가 어떤 지점을 지향하는지 드러내주는 문구다. 쉽게 말하자면 물리학은 상아탑에서만 유용한 고난도 학문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거다. 저자의 책들은 데이터와 간단한 가감승제의 수식만으로도 세상사의 온갖 문제와 궁금증을 풀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작이 그랬듯 ‘관계의 과학’ 역시 흥건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과학의 세계에 진입하는 데 높다란 장벽처럼 여겨지던 용어들, 예컨대 중력파 프랙탈 상전이 같은 단어가 각각 어떤 의미를 띠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면서 이들 용어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일러준다. 책에 담긴 다채로운 내용 가운데 비폭력 저항운동이 성공하는 방법을 다룬 챕터를 살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통계물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1900년부터 2006년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저항운동 사례 수백 건을 분석했다. 폭력적인 저항운동과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이 각각 얼마나 다른지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성공률이 2배 이상 높았다. 저항운동이 성공을 거둔 뒤 독재가 아닌 민주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도 ‘비폭력’일 때가 훨씬 높았다.

자,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다음부터다. 저항운동 참가자가 전체 인구의 3.5% 수준을 넘기면 권력을 움켜쥔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데 모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런 저항운동은 모두 ‘비폭력’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5000만 인구의 3.5%, 그러니까 약 200만명이 촛불을 들면 저항운동의 성공 가능성이 100%란 얘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각기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가상 사회를 다룬 실험 내용이 이어진다. 이 사회는 A라는 의견과 B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의견 A를 가진 사람이 의견 B를 지닌 시민을 만나면 그간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누그러지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어떤 상황에서건 A를 고수하는 강한 신념의 집단 Ac가 있다고 가정하는 거다. B는 구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라고, Ac는 어기찬 의지를 가지고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보자. B가 대부분인 사회에서 여론이 A로 수렴하려면 Ac의 비율이 얼마나 돼야 할까. 실험 결과는 13.4%다. 13.4%가 되기 전엔 B가 다수지만 Ac의 비중이 13.4%를 넘어서면 여론은 구정권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로 서서히 나아간다. 물리학에선 앞서 말한 ‘3.5%’, 지금 등장한 ‘13.4%’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상전이(相轉移)’라고 부른다.

“딱 13.4%의 사람이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면 사회 전체를 변하게 할 수 있다. …촛불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겪어 깨닫게 된 점이 있다. 변화는 소수의 훌륭한 지도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난, 2016년의 촛불이 광화문광장만을 밝힌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의 미래도 함께 밝게 만들었다.”

이렇듯 흥미진진한 연구들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니 가독성이 상당하다. 왜 유행은 돌고 도는지, 기본소득이 갈수록 기우뚱해지는 부의 불균형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도 들려준다. 국회 법안 발의 자료를 분석해 끼리끼리 뭉친 국회의원의 연결망을 그려내기도 한다. 책은 이 같은 내용에 과학적인 개념들이 절묘하게 갈마드는 구성을 띠고 있다. 서두에 썼듯 저자는 “물리학자도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데, 여기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 책을 읽으면 “좀 다르게” 보는 방법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명구의 속뜻을 헤아리게 된다. 복잡한 세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패턴이 보이고, 이 패턴을 활용하면 세상의 공식을 만들 수 있음을 근사한 방식으로 설명해주고 있어서다.

“물리학자는 세상을 겨눈다”

여기까지 읽으면 많은 독자는 도대체 저런 이야기가 물리와 무슨 상관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리학이라는 게 한자로 풀어쓰면 ‘만물(物)의 이치(理)를 파고드는 학문’이니 어색하게 받아들일 필욘 없을 듯하다. 저자는 “철학은 명료하게 사유하려는 특별히 완고한 노력”이라고 했던 한 철학자의 말을 가져와 철학의 대상과 물리학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의 필력도 인상적이다. 책을 펴낸 김범준(52)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쉬운 글쓰기’가 과학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다. 누군가 한 듯한 이야기,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이 없지 않은데 저자의 글솜씨 덕분인지 껄끄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유머러스한 대목도 수두룩하다. 저자는 중력파를 설명하면서 배우 차은우와 자신이 닮았다는 기함할 만한 농담을 던지고, “필자의 책을 사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면서 전작과 신작의 가격이 각각 얼마인지 친절하게 일러준다.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아름다움이 풍성해진다고 귀띔해주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붉은 노을과 쪽빛 가을 하늘, 전혀 다른 하늘의 이 두 색을, 공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으로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전에 느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다. 거꾸로다. …과학은 세상의 여전한 아름다움의 다른 면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눈이다.”

다양한 과학 정보를 제공받는 재미가 크지만, 그것보다는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케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포인트일 것이다. 저자는 “과학 활동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는, 계급장 뗀 치열한 토론과 열린 소통의 방식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진다면, 민주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를 더 앞당길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

책에는 베스트셀러 시장을 분석한 글도 담겨 있다. 판매량이 최댓값까지 올랐다가 절반으로 떨어지는 시점까지의 기간, 즉 책의 ‘반감기’를 조사했더니 두 달이 채 못 됐다는 것이다. 이 공식에 따르면 ‘관계의 과학’ 역시 앞으로 1년쯤 지나면 일주일에 한두 권 팔리는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책은 교수들의 ‘실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저자가 일반 독자를 위해 ‘관계의 과학’ 같은 책을 내는 건 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서, 과학의 중요성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은 부분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물리학자는 세상을 겨눈다. 바로 앞 조만큼이 아니라, 아스라이 보이는 저기 저 너머를. 바로 내일이 아니라,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미래를 말이다. 내일 한 끼의 점심을 굶더라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100년 뒤, 아니 1000년 뒤에도 여전히 의미 있을 질문을 지금 시작해야 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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