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부터 이어진 한·일 외교 갈등을 지켜보고 있자니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이 문득 떠올랐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문장은 어렵지만 뜻은 간단하다. 국가 간 외교 협상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전쟁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동네 잡배가 말싸움으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자 주먹질을 벌이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총으로 하는 외교이며, 외교는 말로 하는 전쟁”이라고도 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일본의 반인륜 범죄가 1990년대에 폭로된 이후 한·일 과거사 외교는 대체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한국은 반인륜 범죄가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일본 정부가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은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법적 의무가 종결됐다는 입장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간극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그렇다.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위안부가 “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며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 예산으로 10억엔을 위안부 재단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다.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정부와 아베 정권이 청구권협정 해석을 둘러싼 이견을 놔둔 채 위안부 문제를 우회하려 머리를 맞대고 짜낸 꼼수다. 한국 측은 법적 책임, 일본 측은 도의적 책임을 주장하며 평행선을 긋자 관형사를 빼고 ‘일본 정부 책임’으로 뭉뚱그렸다. 박근혜정부는 현존 위안부 해법 중 가장 진전된 합의라고 자찬했지만 국민 정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졸속 합의’ ‘외교 참사’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위안부 합의는 외교 협상으로 과거사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씁쓸한 교훈만 남겼다.

지금이 클라우제비츠가 살았던 18~19세기라면 한·일은 전쟁을 치렀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다. 우리 국군이 도쿄를 점령하거나 아베 총리를 포로로 잡아 승리했다면 과거사 갈등은 단번에 해결됐을 테다. 물론 패배한 측도 호시탐탐 복수전을 노릴 테니 한·일 간에는 늘 전운이 감돌았을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알자스-로렌 영유권 확정을 위해 19~20세기 사이 세 차례나 전면전을 벌였다.

물론 한·일 전쟁은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다. 클라우제비츠의 시대와 달리 현대 국제법은 침략전쟁을 불법으로 간주한다. 한국이나 일본이 상대편에 선제공격을 감행하면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를 감내해야 한다. 국제법까지 갈 것도 없다. 한·일 양국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다.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소동에서 드러났듯 미국은 한·일 갈등이 자국의 국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개입한다.

결국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풀 방법은 대화뿐이다. 문제는 정치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국내정치가 외교를 끌고 다니며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심하다. 아베 정권은 정치 스캔들이 불거지면 한·일 갈등을 부추겨 비판 여론을 잠재웠다. ‘촛불정부’라는 문재인정부도 일본보다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기는커녕 ‘죽창가’ ‘12척 배’를 운운하며 똑같이 굴었다. 한·일 갈등이 총선에 호재라는 보고서를 여당 싱크탱크가 작성했다는 보도는 차라리 오보였으면 싶다.

한·일 정치인들이 외교를 국내정치의 꽃놀이패쯤으로 여기며 정쟁 도구로 삼는 동안 양국 국민 사이의 감정적 골은 깊게 팼다. 국민감정이 악화되는 만큼 한·일 외교 당국이 대화로 문제를 풀 여지는 비례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 외교를 정치에 악용한 데 대한 청구서인 셈이다.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일본보다 한국 쪽이 훨씬 크다. 일본은 청구권협정의 틀만 방어하면 되지만 한국은 그 틀을 초월하는 창의적인 해답을 도출해야 한다. 외교적 공간이 줄어들수록 불리해지는 건 한국 쪽이다.

당장 문희상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논의 중인 ‘1+1+α’ 방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와 우리 국민을 어떻게 납득케 할지 의심스럽다. 이 방안은 위안부 합의와 같은 꼼수조차 담고 있지 않다. 일본이 주장하는 도의적 책임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준 것이라는 비판은 정당하다. 솔직히 말해 이번 정권의 대일(對日) 기조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조성은 국제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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