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 사망자 370명 중 249명
가족과 연락 됐지만 시신 인수 거부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 사유 들어


무연고 사망자의 마지막 기록인 장례의전 의뢰 서류엔 ① ② ③ 숫자가 붙어 있다. 구청이 망자를 분류하는 방식이다. 아예 연고자가 없는 경우 ①번, 기록상 가족(부모·형제·배우자·자녀 등)이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찾을 수가 없으면 ②번을 적는다. 가족에게 연락이 닿았지만 시신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한 경우가 ③번이다. ‘무연고(無緣故)’라는 말 그대로라면 ① ②번이 많아야 하는데 실상은 ③번이 대부분이다. 올해 장례를 치른 서울 무연고 사망자 370명 중 249명(67.3%)이 ③번이었다. 연고자가 있었지만 시신마저 버림받은 것이다.

그들은 왜 피를 나눈 망자와의 연을 외면했을까. 국민일보는 15일 무연고 사망자 중 연락이 닿은 유족들을 인터뷰하고, 유족들의 시신처리 위임장도 모두 살폈다. 돌아온 답에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는 하소연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연이 끊긴 지점에는 가난이 있었다

“나도 기초생활수급자인데, 돈이 없잖아 돈이….” 임수윤(가명·73)씨는 지난 9월 무연고자로 사망했다. 임씨는 ③번이다. 자녀 두 명은 두 차례 우편으로 진행된 시신인수 통보에 답을 하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은 임씨의 남동생을 찾아 사망 사실을 알리고 시신 인수를 통보했다. 남동생은 생개(생계의 오자) 곤란’이라고 적은 시신처리 위임서를 제출했다.

“병원비랑 장례비를 내야 한다고 하는데, 아니 나도 기초생활수급자인데 돈이 없잖아. 딸들도 있는데 걔네들은 동사무소에서 연락을 해도 안 된다고 하고.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시신처리 해 달라고 위임을 했지.”

남동생은 모두가 평생 가난했다고 했다. 그는 “아주 어릴 적 전남 곡성에서 살다가 부모님이랑 같이 상경했다. 누님이나 형님, 나도 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와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다. 형님은 노상에서 야채·과일 장사하다가 이혼하고, 그러다가 중풍이 와서 일도 못하고 한 10년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고 말했다. 남동생은 지은 지 30년 넘은 낡은 2층 주택에 채 30㎡(약 9평)도 되지 않는 작은 방 하나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청량리 주택가 반지하방에서 가난하게 살다 숨을 거둔 형과 주거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동생은 “옛날에는 다 가난했으니까 배운 게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몸 쓰는 거밖에 더 있겠나. 그러다 몸이 고장 나면 일을 못하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고…”라고 말했다.

가난해서 못 배우고, 못 배워서 가난한 악순환이 무연고 사망자와 그 가족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신처리 위임서에는 유독 오자가 많이 보였다. 지난달 아들 김문종(가명·54)씨를 먼저 보낸 모친 서류에는 “몸도 많이 불편하고 많이 아품니다. 여유도 없고 힘이 듬니다. 눈물만 남니다”라는 글이 적혔다. 다른 위임서에도 ‘경제’를 ‘경재’로 쓰거나, ‘장례’를 ‘장래’로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아예 한글을 쓸 줄 몰라 담당 공무원이 대필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10월 숨진 무연고 사망자 최규대(가명·61)씨가 살던 서울 강동구의 반지하 방 모습. 최씨가 숨져 있는 것을 이웃이 발견해 신고했다. 최씨의 형은 시신 인수를 포기하며 “없이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윤성호 기자

빈곤은 모정(母情)까지 짓밟았다

지난 3월 무연고로 사망한 윤창식(가명·38)씨의 모친은 “아들이 죽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미국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광진구의 한 고시원 방안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친은 그러나 시신인수를 못하겠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돌아갈 비행기표 값만 가지고 왔다. 도저히 장례 치를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두 달 전 사망한 정분이(가명·79)씨도 유가족이 있었지만, 가족들이 직접 장례를 치러주지 못했다. 8남매 중 막내 여동생이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가족이다. 여동생은 “옛날에는 형제들은 많아도 다 못 살고 그랬잖아.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그 뒷바라지하느라 결혼도 포기하고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일흔을 넘긴 여동생은 고인이 된 큰언니처럼 생계급여 수급자였다. 거주 불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됐거나, 외국 출국 이후 입국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등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 유가족은 최소 30명에 달한다. 정씨 여동생처럼 자신도 기초생활수급자라고 밝히거나 장애를 지녔다고 말한 사람도 여러 명 이었다.

유가족들은 때때로 가족 장례도 치러주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최규대(가명·61)씨의 형은 “서로 없이 살다 보니까 여기저기 떨어져 살게 되고, 그렇게 (장례도 못 치러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식(가명·62)씨의 형은 “떨어질 재산이라도 잔뜩 있고 그랬으면 내가 뒤처리를 했겠지…. 먹고 살기 힘드니까 세상이 그렇게 되더라”며 “명절에 제사라도 지내주고, 그거라도 도리를 하는 수밖에 없지 뭐”라고 했다.

김규민(가명·52)씨는 지난 10월 종로 숭인동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김씨는 직업이 없었다. 10여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다는 오빠는 경기도 군포의 지은 지 30년 된 빌라에서 산다. 그는 “(죽은) 동생은 동거남을 따라 가출했고, 남동생은 중2 때 출가해 스님이 돼 연락이 두절됐다.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를 제가 홀로 모시고 있어 돈이 없다”고 했다.

최용수(가명·65)씨는 종로의 한 고시원에서 거주하다 몸이 급격히 나빠져 병원으로 옮겨졌고, 지난 10월 그곳에서 죽었다. 사인은 폐렴과 그에 따른 다발성 장기부전. 그의 딸은 “4살 때 아버지의 폭력과 생활고로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아버지는 한 번도 부모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금 어머니도 기초연금수급자로 제가 돌봐야 하는 입장”이라며 시신인수를 거절했다. 당장 장례를 치르기에는 팍팍한 경제적 사정과 어려운 시기 가족을 등졌던 고인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족의 장례를 치러주기 힘들 정도로 빈곤한 사례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시신인수 거부사유가 확인된 무연고 사망사건 114건 중 47건(41.2%)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사유로 등장했다.

정현수 임주언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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