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생생한 자료 토대로 빈곤 퇴치 능력 향상시킨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
각 지역의 특성을 파악해 맞춤형 해결방안 설계에 필요한 경험적 증거들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


지난 10일 개최된 노벨상 시상식에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에스테르 뒤플로 교수 부부와 마이클 크레이머 교수가 ‘실험적 기반의 연구방법’으로 전 세계의 빈곤 퇴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경제학상을 받았다. 이들은 케냐와 인도 등 세계 40여개 나라의 빈곤 현장에서 저소득층 재정지원, 소액금융, 학교교육, 보건의료 등 공공프로그램의 효과를 측정하는 수백 건의 무작위 대조실험을 실시했다. 연구진은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의 생활상과 관련된 구체적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과학적 엄밀성을 유지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개방적 태도로 해석해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다양한 빈곤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데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뿐 아니라 다수의 학자들이 정책은 ‘증거에 기반’을 두고 설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거기반 정책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정책 또는 정책결정자의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탁상공론에 의존하는 의견기반 정책과는 대조된다. 가장 바람직한 증거는 정책의 효과성을 입증할 자료들을 생산하는 정책전문가의 연구 결과로부터 도출된다. 한편 집행 현장의 실무자들은 무엇이 어떤 조건하에서 작동하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이들의 경험과 전문성으로부터 도출된 증거 역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정책수혜자인 주민의 특성과 요구, 가치, 선호 등에 관한 지식 역시 증거로서 통합·판단돼야 진정한 증거기반의 정책이 수립될 수 있다.

정책설계에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부터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실인 ‘정책랩’과 ‘리빙랩’을 운영해 왔다. 정부랩이라고도 불리는 정책랩은 정부부처 내부에 설치된 ‘정책실험을 위한 조직’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Policy Lab, 덴마크의 MindLab, 핀란드의 Sitra Lab 등이다. 예를 들면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사무처에 설치된 영국의 폴리시랩은 공무원과 여러 분야의 연구자, 디자이너, 정책입안자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전문조직이지만 프로젝트별로 관련 부처 및 집행기관 공무원, 정책대상자인 이해관계자와 주민들과 협력해 공공문제 해결을 위한 경험적 증거를 정책실험을 통해 확보하고 해결방안을 설계한다. 지금까지 치안, 주택, 교통, 보건 및 직장, 육아 등 다양한 정책 분야에 걸쳐 5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여기에 7000명 이상의 공무원이 참여했다. 해외 사례에 비춰보면 정책랩은 정책대상자, 정책 및 현장전문가, 정책실무자 및 결정자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운영되므로 이들 간 협력과 소통을 극대화하면서 정책설계에 필요한 데이터와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정책실험에서 수집된 현장 자료와 함께 정부기관이 축적한 행정데이터를 포함한 빅데이터가 결합돼야 적실성이 보다 높은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리빙랩’은 살아있는 실험실, 일상생활 실험실, 마을 실험실 등으로 불리며, 사용자인 주민이 직접 나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민 참여형 실험공간’이다. 해외에서는 일찌감치 리빙랩 프로젝트를 활성화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해 왔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과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2010년부터 에너지 절약을 주제로 리빙랩 프로젝트를 공동진행해 주민들은 전기 사용비용을 절감했고, 참여기업들도 부가서비스를 판매하고 부대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정책랩과 리빙랩이 활성화되고 있다. 정책랩은 외국과는 달리 정부기관 소속이 아닌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부터 ‘열린혁신플랫폼’ 사업을 통해 연구기관, 기업, 지방자치단체 등이 주도하는 정책랩을 활용해 혁신성장 관련 정책과 실천전략을 다양한 현장전문가와 함께 수요자 중심으로 설계하겠다는 계획이다. 도시재생, 환경문제, 스마트시티 등 리빙랩 관련 정부부처와 공기업의 사업은 6개월 이내 단기 정책과제로 진행되거나 1∼2년 내에 마무리되는 일회성 공모사업이 대부분인데 리빙랩에서 수집된 증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보다 장기적인 시계를 가져야 한다. 지역 현장에서 보면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리빙랩 사업이 통합적 성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관련 부처 간, 사업 간, 활동 주체 간 연계와 협력도 중요한 과제다.

정책랩 또는 리빙랩을 운영하는 기본 취지는 정책이 이데올로기 또는 탁상공론에 휘둘리지 않고 지역 특성을 제대로 파악해 맞춤형 해결방안의 설계에 필요한 증거를 확보한다는 데 있다. 정부는 정책실험을 통해 파악한 자료뿐 아니라 해당 분야의 국가 수준 통계 데이터베이스, 지역주민의 고용, 소득, 의료, 복지 등 그간 축적된 행정자료 등 빅데이터 분석 자료까지 정책설계의 증거로 통합,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남궁근(서울과기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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