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한 노인이 지난 12일 좁은 골목길을 힘없이 걷고 있다. 돈의동에선 올해도 여러 명의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최현규 기자

가정폭력 시달렸던 할머니
식모살이 전전하다 죽음 맞아
날때부터 부모와 연 끊긴 소년
대출기록이 유일한 흔적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한 아내, 가족과의 불화로 가출한 청년이 수십 년 거리를 배회하며 살다 혼자 생을 마감했다. 날 때부터 부모와의 연이 끊긴 고아가 평생 새 연(緣)을 만들지 못한 채 죽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뒤 회한 속에 갇혀 살다 죽은 인생도 있었다. 가정이 해체돼 무연(無緣)으로 추락하는 경로는 이처럼 다양하다. 그러나 무연의 경로에는 공통적으로 빈곤의 냄새가 짙게 묻어났다.

폭력을 피하니 무연이 시작됐다

남영선(가명·82)씨는 고향 강원도에서 시집을 갔다. 폭력 성향이 강한 남편은 허구한 날 때렸다. 참다못한 남씨는 살기 위해 어린 아들을 두고 도망쳤다. 고인은 생전 “하도 맞아서 몸이 퉁퉁 부었다. 동네 사람들이 숨겨줘서 사흘 있다 겨우 도망쳐 나왔다”는 말을 주변에 했다고 한다.

가정의 둘레를 벗어난 남씨는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시골에서 시골로 돌아다니다 서울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동네 주민들은 1980년 후반 무렵부터 남씨가 미아동에서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지냈던 것으로 기억했다. ‘시장통에서 고무대야를 팔았다’ ‘삯바느질을 했다’ ‘몇 해 전 곗돈을 떼였다더라’…. 그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의 파편적인 설명은 남씨의 모진 세월 일부를 겨우 드러냈다.

남씨는 8년 전쯤 동네 세탁소를 운영하던 김모(62)씨 집에 세 들었다. 방을 싸게 내줘 기초생활수급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3년 전쯤부터는 남씨가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하자 김씨가 직접 남씨 끼니를 챙겨줬다. 김씨는 “할머니가 평소 나한테 ‘네 년이 내 딸이여’라는 말을 한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마지막 3년은 경동시장에서 삼(인삼)을 떼다가 믹서에 갈고 꿀에 잰 걸 입에 넣어줬지. 누가 그러더라고 삼 먹이면 오래 산다고. 근데 갈 땐 그냥 가더라. 지난봄인가, 끼니를 챙겨주려 지하방에 내려가 문을 열어보니 입을 떡 벌린 채 누워계셨어.”

김씨는 누워있는 동안에도 종종 “영감이 하도 때렸는데 자식들도 똑같았겠지. 나는 자식들 쳐다도 안 보련다”는 한탄을 쏟아냈다고 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씨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 삶을 몰랐다. “내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인데 어떻게 자세히 알겠습니까. 그 뒤로는 연락 한번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접촉한 아들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도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없는 사람인 양 평생을 살았고, 50여년 만에 접한 소식이 어머니의 시신을 가져가라는 통보였다.

그는 경찰에 “어릴 때 헤어진 뒤로 연락하고 지내지도 않았고, 전혀 교류가 없었다. 형사님께 어머니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해서 봤더니 불쌍하더라. 고생만 하다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시신을) 인수할 의사가 없다. 어머니 보살펴주신 분에게 장례 잘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해 달라. 제가 못하는 거 좀 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올해 60살이 된 아들은 지은 지 30년 된 다세대주택에 산다. 그의 부인은 재래시장에서 장사한다.





무연 소년, 무연사하다

“어렸을 때부터 객지 생활이 시작된 거지. 여기저기 떠돌면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별일 다했어. 닥치는 대로 했어. 공장 노동, 식당 접시닦이 뭐 안 해본 게 없지.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도 먹고 살길이 없으니 다했지.” 지난 2월 서울 중구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정준수(가명·64)씨의 40년 지기 친구 박씨 얘기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5년 태어난 정씨는 어린 나이에 집을 나오면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면서 성씨가 다른 동생이 생겼고, 이 과정에서 집을 나왔다. 친구는 “좀 어렸을 때 집을 나왔다고 들었다. 열대여섯 살쯤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정씨는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했다. 이후 병원을 전전하다가 죽었다. 그 가난한 세월 동안 연이 없었다. 유일한 가족은 이복동생 하나인데, 그는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정씨도 어렵게 살았는데 이복동생도 넉넉하지 않게 살고 있어서 서로 도움 될 형편이 아니었던 거 같다”고 박씨는 22일 말했다.

정씨와 동갑내기 김정규(가명)씨는 지난 2월 서울 금천구 독산동의 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월세가 밀려 같은 건물에 사는 집주인이 방문을 강제로 열었는데, 이미 시신의 부패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였다. 집주인은 “살기만 여기서 살았지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경찰이 연고자를 찾기 위해 주민등록 초·등본, 혼인관계 증명서, 제적등본을 조회했지만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 내사보고서엔 ‘최초 등록지는 서울 용산구 혜심아동복지센터(고아원)로 가족을 확인할 수 없다’고 기록됐다. 그가 지닌 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고아원에 문의했지만 “80년대 이전은 제대로 기록이 안 된 경우가 많다”는 답을 받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그의 인생을 설명해 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수사 서류에 적힌 ‘개인택시를 하던 분’이라는 설명 한 줄, 그가 살던 방 앞에 적힌 ‘방 1개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5만원’이라고 적힌 문구, 우편함에 수북이 쌓여 있는 각종 대출 상환 독촉장이 64년 인생 기록 전부였다. 혼자 평생 힘들게 살다가 혼자 가난하게 갔다.

지난달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금융기관들이 보낸 수십 건의 독촉장 사이로 파란색 봉투가 하나 눈에 띄었다. 아동 구호단체인 유니세프에서 보낸 후원금 지로 통지서였다. 건강보험료마저 몇 달째 밀렸던 김씨는 사망 직전까지 수년간 매달 5만원씩 기부해 온 후원 회원이었다고 한다.

김판 김유나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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