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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김정은의 시그널링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사자들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가젤 무리를 덮칠 때 전력으로 도망가던 가젤 중 일부는 가끔 높이 뛰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가야 하는데 이런 행동은 뭘 의미할까. 동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 튀는 행동은 가젤이 자신의 건강한 체력을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신호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체력이 좋아 잘 달릴 수 있으니 너는 날 잡을 수 없다’는 시그널링(signalling)이다. 본능적인 위험 회피 행동으로 위협자에게 의도적 신호를 주는 것인데, ‘날 잡아 봐라’는 자신 있는 조롱이 섞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 세계도 같다. 동네 조폭이 병을 자기 머리로 깨거나, 웃통을 벗어 무시무시한 문신을 보여주는 것도 시그널링 효과를 내려는 거다. ‘나 이렇게 무서운 놈이야. 이래도 덤빌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거친 언사로 상대를 곧 때려눕힐 것처럼 하지만 웃통 벗고 시계 풀고 안경 벗고 싸움 준비를 길게 하는 행동은 주위 누군가에 싸움 좀 말려 달라는 신호 아니겠는가. 일종의 블러핑이고 정보 조작이다.

시그널링 효과는 마케팅 전략에서 자주 노린다. 미국프로풋볼(NFL) 결승전인 슈퍼볼의 광고 비용은 초당 2억원을 넘어섰다. 1억1000만명 이상이 시청한다는 슈퍼볼의 광고에 수백억원을 지출하는 목적은 단지 판매 제고 효과가 아니라 고객, 경쟁사, 정부, 시민단체, 사내 구성원 등에게 주는 시그널링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금력은 이 정도다’ ‘우리는 다르다’ ‘1, 2년 보고 사업하는 거 아니다’는 신호를 주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다.

‘새로운 길’‘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던 북한이 엊그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모습을 내보냈다. 자위적 국방력을 강조하며 근엄한, 경직된, 화난 김정은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고개 푹 숙이고 받아 적기만 하는 군 최고위간부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김정은은 최근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연말 위기감을 높여 왔다. 대외적으로는 핵·미사일 능력은 충분하니 뭐 좀 내놓으라는 신호를, 대내적으로는 군부를 완전 통제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 같다. 아니면 공갈을 치는 건지도. 서로 속고 속이고 윽박지르고 달래는 얽히고설킨 북·미 간 게임에서 또 어떤 수 싸움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정보·군 당국이 김정은이 어떤 시그널링 효과를 노리는지, 실제 내부는 어떤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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