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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죽음, 두렵긴 하지만


엄청난 외로움과 무서움 엄습…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바르게 살아야 좋은 죽음 맞아… 죽음 조기교육 나쁘지 않다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사후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영원한 이별이 가장 많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죽는 자에게는 되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홀로 떠나야 하는 엄청난 외로움과 무서움, 살아남는 자에게는 친지를 이 세상에선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안타까운 슬픔이 엄습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가장 큰 스트레스에 속한다. 질병으로 본인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거나 가족의 죽음을 겪는 건 상상하기 힘들 만큼 큰 고통이다. 건강검진 때 작성하는 스트레스 설문지에 ‘최근 1년 이내에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란 항목이 들어 있는 걸 보면 죽음 스트레스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내 어릴 적 어른들은 죽음이란 말 자체를 금기시했다. 심지어 죽음으로 곧잘 이어지는 암이란 단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게 했다. 닥칠 때 닥치더라도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 게다. 천국이나 내세 관념이 없는 유교 집안에서 자란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직면해야 하는 숙명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종교지도자, 철학자, 문화예술인들이 죽음의 의미를 다각도로 해석하며 아름다운 죽음을 찾으려 애쓴 것도 그것이 인생사 피할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죽음에 따른 인생 허무를 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죽음이 있기에 삶에 의미가 있음을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이들의 언사를 살펴보면 삶과 죽음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당신이 진정 죽음의 뜻을 알고 싶으면 살아 있는 몸을 향해 심장을 활짝 열어보아라. 삶과 죽음은 강과 바다가 하나임과 같이 한 몸이기 때문이다.”(칼릴 지브란) “살아가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된다. 죽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다.”(모리 슈워츠)

심지어 죽음을 찬미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이란 노고와 고통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키케로)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죽음이다.”(스티브 잡스) “궁극적인 자유는 죽음밖에 없다.”(김용옥) 하지만 이런 말이 죽음을 맞는 사람에게 제대로 위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좋은 휴식을 위해, 혹은 궁극적 자유를 얻고자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살아남은 자에게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힌트가 될 뿐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이런 라틴어 문구가 새겨진 간판이 있다.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란 뜻이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이란다(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소설 제목으로까지 등장했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도 유사한 의미이지 싶다. 대략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니 말이다.

10여일 전, 친한 직장 후배가 먼 길을 떠났다. 독실한 기독 신자로 2년여 동안 힘든 투병 생활을 했으니 삶과 죽음에 대해 온갖 생각을 다해 봤을 것이다. 생전에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생의 종착역에 이를 즈음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으니 분명 천국에 들었을 것이다. 그와 작별하면서 나 또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무력한 존재란 생각이다.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가 이번처럼 진하게 와닿은 적이 없다. 살아 있는 게 결코 살아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 순간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일진대 그것에 진정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해 본다. 매일 아침 건강과 안전에 대해 은총을 청하면서 감사기도를 하지만 입에 발린 기도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쉼 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성인이나 수도사가 아니면 힘든 건지 모르겠지만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끊임없이 천착해야 할 인생 과제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내 생에 대한 평가가 2~3일간의 장례 기간 중에 끝나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섬뜩해진다. 실제로 장례식장은 해당 고인에 대한 평가회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선각자들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옳은 삶을 살자고 그토록 설파했나 보다. “인간은 옳은 생활을 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다. 완성된 인간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톨스토이)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 잘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레오나르도 다빈치)

여기에 더해 값지고 알찬 인생을 살려면 어릴 적부터 죽음에 대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서움이 가실 나이쯤 되면 장례식장에 데려가 보기도 하고, 화장장 구경도 시켜보는 게 어떨까. 죽음에 대한 조기 현장교육인 셈이다. 죽음학 연구자 김달수는 죽음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한다.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좀 더 일찍 안다면 올바른 생명존중의 마음과 자신의 앞날에 대한 설계를 일찍 하게 되고, 부모가 항시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도 일깨워주고, 가족의 소중함도 알게 하면서 막연한 공포나 두려움을 없애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죽음학 스케치’)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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