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이모(58)씨가 지난 12일 3.3㎡(1평)도 되지 않는 좁은 방에 서 있다. 2016년까지 건설업을 했다는 이씨는 고관절을 다친 뒤 일자리를 잃고 쪽방촌에 들어왔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씨는 “명절 때만 되면 마음이 괴롭고 쓸쓸하다”고 말했다. 최현규 기자

무연고 장례 지켜본 또 다른 무연고자들
가난으로 빠지며 가족과 연락 끊겨
“나한테도 닥칠 일” 같은 처지 걱정


지난 4일 저녁 서울 영등포구 한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남자 3명이 종이컵으로 소주를 기울였다. 좀체 말이 없다. 겨울 한파가 시작되려는지 한 번씩 부는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다. 추위와 취기로 곧 볼이 불콰해졌다. 이들은 동료 나성연(가명·57)씨 무연고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뒤 돌아온 길이었다. 나씨는 지난 11월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죽은 지 5~6일쯤 지나 온몸에 경도~중증도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다. 평소 공공근로를 마치면 함께 소주를 마시며 고된 일상을 위로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의 빈자리가 이날 침묵을 길게 했다.

“누군들 처음부터 가족과 헤어지고, 가난하게 살다 혼자 죽고 싶었겠어요.” 서동선(가명·53)씨가 나씨 얘기를 하려다 멈추고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한숨을 내뱉은 뒤 “나씨에게도 꿈이 있었다”며 말을 이어갔다.

“형님은 시설에서 공공근로를 하면서 700만원을 모아뒀어요. 지난 8월 시설 보호기간이 끝나 고시원을 얻어 나갔는데, 그때 짐을 챙기면서 저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겨울에 공공근로 딱 한 번만 더 해서 1000만원을 만들면 딸에게 주고, 고향인 전남 해남에 내려갈 거야’라고요.”

나씨는 딸에게 한 번이라도 아버지 역할을 해 보려고 몸이 아파도 일을 하며 버텼다고 한다.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에서 운영하는 야학에서 컴퓨터 강의도 들었다. 고향에 내려가 버섯 농사를 지으면 활용할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가난과 외로움을 술로 달래며 일했는데 그게 병을 키웠다. 부검의는 그의 사인(死因) 칸에 ‘만성 알코올중독 추정’이라고 적었다.



딸은 장례에 오지 않았다. 24일 확인한 구청의 공영장례 지원 의뢰서에는 ‘연고자 알 수 없음’을 뜻하는 ②번 번호가 붙어 있었다. 딸의 주소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죽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서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딸이 죽은 아버지를 버렸다”고 여겨 원통해 했다.

나씨 사연을 전하는 그의 말에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 역시 가족과 헤어져 지내는데 자신의 미래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염려 때문이다. 고시원과 쪽방을 전전해 온 삶의 궤적은 형이나 자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건설현장에서 외주를 받아 일했던 서씨의 사정이 어려워진 건 2006년쯤이었다. 불황 여파로 허덕일 때 설상가상 막내 아이가 아팠다. 빚과 치료비에 짓눌리다 아내와 이혼했다. 혼자 빚을 떠안으려고 ‘위장 이혼’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해지다 진짜 이혼 상태가 돼버렸다.

이후 10년은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주소지를 고시원과 친구 집 등에 올려놓고 공사판에서 살았다. 10년 동안 주소지가 10번 이상 바뀌었다. 그때 혹사시켰던 몸이 고장났다. 허리에 협착증이 오면서 일을 나갈 수가 없게 됐다. 더 버티지 못하겠다 싶어서 찾은 곳이 시설이었다.

“말이 ‘아빠’지 키워주지도 않은 저는 아이에게 남이죠. 그래서 과연 이놈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서씨는 그날 용기를 내 10년 넘게 떨어져 지낸 딸에게 전화했다. “아빠 친구가 죽어서 딸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버렸대. 아빠도 혼자잖아. 이런 상황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에이, 그런 게(버리는 게) 어딨어.” 딸은 서씨가 노숙인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막상 닥치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 가난할 수도 있고….” 다시 묻자 “아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씨는 엷은 미소를 지었는데, 곧 다시 침울해졌다.

옆자리에 앉은 김현창(가명·43)씨에게도 무연고 장례로 세상을 떠난 나씨의 죽음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처럼 가족과 연락이 안 되고 혼자 살게 되면 나한테도 닥칠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성연이형 보니까 부모님께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잘 살지 못하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용기가 나질 않는다”고 했다.

김씨는 스스로 택한 무연고 삶이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평범한 삶을 살던 그는 20대 초반 다리 신경이 굳는 희귀난치병이 발병했다. 갑자기 찾아온 장애는 20대 청년의 꿈을 앗아갔다. 그 무렵 부모는 다툼이 심해졌고 이혼한 뒤 각자 재혼가정을 꾸렸다.

“부모님이 새 가정에 장애가 있는 아들까지 데리고 가긴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혼자 살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죠. 처음엔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월세를 살았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닥났어요. 몸이 불편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은 앉아서 전화로 하는 텔레마케터나 홈쇼핑 상담 업무였죠. 30대까지는 그래도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마흔이 넘어가니 그런 일자리도 찾기가 점점 어려워졌어요.”

나이가 들수록 가난은 깊어져 이사가 잦았다. 더 싼 월세가 있는 곳으로 옮겨다녔고 그때마다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보증금이 있는 50만원짜리 월세 주택에서 보증금을 낮춘 월세 30만원으로,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원에서 식사까지 해결 가능한 월세 30만원짜리 고시원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2년을 고시원에서 버텼는데 나중엔 그마저 부담이 됐고, 결국 노숙인 보호시설을 택했다. 더 깊은 가난으로 빠져가는 과정에서 가족과의 연락이 끊겼다. 어느 시점부터인지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서씨나 김씨가 살아온 경로는 올해 무연고 장례를 치른 370명(지난 11월 기준) 대부분의 인생과 겹친다. 서씨는 “시설에서 만난 60%는 가족과 연락을 안 하더라”며 “다들 스스로를 무연고자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 역시 나씨처럼 곧 있으면 시설을 퇴소해야 한다. 그의 꿈은 돈을 모아 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겨우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일로 목돈 마련이 가능할지, 혹 몸이라도 쇠약해져 나씨와 같은 결말을 맞지는 않을지 김씨는 염려했다.

김유나 정현수 기자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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