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의 모습은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투쟁의 삶’으로 유한한 자원과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이다. 투쟁의 삶은 이번 경쟁의 결과에 따른 보상이 연속되는 경쟁에서 승리의 발판이 되는 승자독식의 삶이다. 이 삶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달리, 패자부활이나 역전의 삶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한 번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불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한경쟁하고, 현재의 순위를 유지하거나 상승시키기 위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벌여야 하는 삶이다.

두 번째로 ‘정의로운 삶’이다. 이 삶의 모습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에 압축되어 있다. 황금률에는 호혜성 또는 상호성의 원리가 담겨 있는데, 쌍방이 행위를 동시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의 호혜성은 ‘네가 하면 나도 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하면 너도 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률이 지향하는 바가 온전히 달성될 수 없다. 100m 달리기 경주를 예로 든다면, 어느 선수가 심판 몰래 출발선에서 50m 앞선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다른 선수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반칙으로 인한 이익이 경기규칙의 준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클 때 반칙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공정하게 경쟁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칙한 선수에 대해서는 정당한 응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직하게 출발선에서 기다려야 한다. 한편, 공정하게 경쟁한 이상 1위부터 꼴찌까지의 순위 매김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승자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더라도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결국 정의로운 삶은 공정한 경쟁의 결과에 대하여 겸허하게 승복하는 삶이다.

세 번째로 ‘(에로스적) 사랑의 삶’이다. 이 삶은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호혜적인 보상이나 응보와는 상관없이 인간 자체에 대한 존귀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삶이다. 능력이나 노력에서 천차만별인 인간 상호 간의 경쟁은 권력, 지위, 부에 있어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차이를 방치하면 불평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고, 불평등이 심화되면 공동체의 연대와 통합은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는 투쟁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동체 구성원들이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삶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사랑의 삶으로 보완해야 한다. 사랑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증세 등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법적 제도를 만드는 것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제도의 미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자발적으로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의 삶에는 자기애(自己愛)라는 한계가 있다. 나는 설령 굶어 죽더라도 이웃에게는 먹을 것을 주겠다는 것은 자기애와 양립할 수 없다.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자기애가 전제되어 있다.

네 번째로 ‘(아가페적) 초월의 삶’이다. 이 삶은 자기애를 넘는 자기 부인(否認)과 희생의 삶이다. 사랑의 삶이 나르시시즘이 아닌 ‘에로스적 자기긍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이 초월의 삶은 ‘아가페적 자기부정’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가르침이 지향하는 삶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초월의 삶은 ‘오른 눈이 잘못을 저지르면 빼내어 버리고, 오른손이 잘못을 저지르면 잘라버리는 삶’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돌려 대주는 삶’ ‘고발하여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주는 삶’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동행해 주는 삶’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종이 되는 삶’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삶이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올 한 해 동안 주로 몇 번째의 삶을 영위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통합과 연대를 위한 삶이었는가. 아니면 분열과 대립하는 삶이었는가.

어느 신문 기사의 제목과 같이 ‘저출산이라는 국가재앙’을 물려받아야 할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삶의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다음 세대가 기성세대의 영향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분열과 대립의 역사를 상속하게 된다면 한마음이 되어도 대응하기 어려운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새해에는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보다 성숙한 지도층의 모습을 기대한다.

천종호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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