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십자가 종 울려라, 사람을 깨우면 대학이 깨어나리라

기독교육가 윤인구 목사와 국립 부산대

부산대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이었던 윤인구 목사가 가나안 땅 무지개를 형상화해 발주한 옛 부산대 정문의 현재 모습. 문 꼭대기에 예배당 종을 달았다. 이 정문은 옛 대학본부(현 인문관) 건물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국립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에 고딕 양식의 석조 예배당이 있다. 그 예배당은 1958년 예배가 올려졌다는 기록을 끝으로 예배당의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부산대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우리나라 제2의 국립대로 알려진 부산대 캠퍼스 중앙에 예배당이 실재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리고 그 캠퍼스는 1950년대 예배당 종(鐘) 모양으로 개발됐다. 당시 정문은 가나안 땅 무지개를 형상화해 세워졌다. 옛 본관(현 인문관)의 16m 캐노피 현관에는 눈 밝은 자만 알 수 있는 십자가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옛 정문과 본관은 현재 국가 등록문화재 건축물이다.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개교 당시 석조 예배당(위)과 현재 모습. 부산대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비밀이 하나 더 있다. 무지개 모양 옛 정문 꼭대기에 작은 종이 하나 달려 있는데 그 종 속에 주먹만 한 종이 있고 그 종 속에는 타종을 위한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가 작은 종을 치고, 작은 종이 큰 종을 친다. 이 종의 비밀을 발견한 부산대 김재호 교수는 “십자가가 한 사람을 깨우면 그 한 사람이 대학을 깨운다는 설립 취지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2008년 기독 정신에서 출발한 부산대의 설립 다큐멘터리를 찍어 옛 예배당에서 발표를 겸한 예배를 드렸다. 50년 만에 이뤄진 예배였다.

설립자 정신 담긴 캠퍼스 예배당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달 23~24일. 부산지하철 부산대역에 내려 금정산 방향 부산대 캠퍼스로 향했다. 대학로 특유의 부산함이 거리에 가득했다. 20여분 후 금정산 자락 부산대 인문관 캐노피 현관을 지나 나선형 계단을 오르자 통유리 너머로 시내가 보였다. 1959년 건축가 김중업에 의해 설계된 지하 1층, 지상 4층 9196㎡(2782평) 외벽 유리 건물이다.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웠던 유리 외벽 건물은 지금도 캠퍼스 내 다른 건물을 압도하는 조형미를 담고 있다.

1950년대 말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완공 당시 사진.
윤인구 목사가 그린 종 모양 캠퍼스 배치도.

“1955년 늦가을 부산대 신입생 입학요강에 캠퍼스의 종 모양 배치도와 본관의 평면도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의 모든 건물에 대한 설계도를 윤인구 목사(부산대 설립자 및 초대 총장·연세대 총장)가 다 직접 그려 두었다.”(김중업 제자 정권섭 증언)

김중업은 말년 자신의 설계 작품 목록에서 이 건물을 삭제했다. 설계 발주자 윤인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인구 여동생 윤학자의 증언.

“오빠는 진리의 종소리가 퍼지는 캠퍼스를 구상했어요. 처음에는 컴퍼스가 없어 접시나 큰 쟁반을 뒤집어 놓고 종 모양을 본떴어요.”

윤인구 목사 (1903~1986)

윤인구는 6·25전쟁 직후 지구상 최빈국 대한민국을 ‘진리와 자유’로 일으키고자 했던 성직자였다. 그는 1931년 9월 경남 진주 옥봉리교회(현 진주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해 이듬해 목사가 됐다. 옥봉리교회는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와 함께 부산·경남 3대 교회였다.

윤인구는 김해 구포(현 부산) 태생으로 동래고보, 일본 명치학원 신학부,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영국 에든버러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당대에 보기 드문 엘리트였다. 동래고보에서 3·1운동으로 퇴학 처분을 당하고 유학 간 명치학원고교 때 토마스 아 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감화돼 청교도적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죽을 때까지였다.

무지개 정문 옆 대나무 숲에서 윤인구의 삶을 설명하는 김재호 교수.

김재호 교수가 밝힌 일화. “백만인구령운동의 열기가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미쳤을 때 일이죠. 윤인구의 사촌동생이 3년 만에 진주교회를 사임한 그에게 백만인구령운동을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어요. 그때 윤인구는 동생에게 ‘자네가 100만명을 맡으면 나머지 2900만명은 내가 맡지’라고 말했어요. 마산 복음농업실수학교 교육 등을 통해 천국이 누룩처럼 번질 수 있음을 확신한 거죠.”

이후 윤인구는 교육 사역을 본격화했다. 민족문화에 뿌리 박은 기독교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1939년 그는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 등과 조선신학원(한신대 전신) 설립을 주도했다. 일제는 그를 육군 형법, 치안유지법 등 9가지 죄목으로 50여일 동안 가뒀다. 고문과 압박이 따랐다. “안 때리드나.” 어머니가 묻자 “줄 세워 놓고 때리다가 내 앞에서 그만두데요. 하하”라며 안심시켰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노골화됐고 목회자의 신사참배 등이 이어지면서 그는 탈진해 고향 구포로 내려왔다. 일제는 아버지 윤상은에게 군수용 벌목을 강제 할당했다. 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김해 상동산에서 벌목을 했다. 절망의 시간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절을 새기고 또 새기던 시기였다.

해방이 됐다. 미 군정은 산속의 그를 찾아내 도(道) 학무과장을 시켰다. 그는 임시 교원양성소(부산교대 전신) 등을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을 위한 사역을 본격화했다. 부산신학교(부산장신대 전신)도 이때 설립했다. 그가 작성한 부산 민립대학 설립 취지문.

‘오늘날 조선인이 세계문화 민족의 일원으로 남과 어깨를 견주고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도다.’

윤인구는 기성회와 시민의 힘으로 민립대학을 만들었다. 국가 재정이 튼튼해질 때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이어가겠다며 ‘국립 부산대’ 인가를 받았다. ‘대학 교육은 국가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소신으로 국가에 기증한 셈이다.

선교사 매켄지家 전시회 연 박물관

다시 부산대 옛 예배당. 윤인구가 50년대 대신동 임시 교사에서 이전해 헌당한 ‘예배당 박물관’에선 ‘호주매씨 가족의 부산소풍이야기’라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정산 계곡 돌을 옮겨 지은 예배당 벽에는 ‘박물관A’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도 부산대생들은 ‘호주매씨’ 성을 가진 인물들의 근대사진전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전시 내용은 부산·경남 의료선교에 힘쓴 매켄지(한국명 매견시) 부부, 부산 일신병원에 헌신한 부부의 딸 매혜란·혜영 자매 이야기다. 부부는 나환자(한센씨병) 병원을 설립했고 고아·과부를 돌봤다. 자매는 도시 빈민 구제에 평생을 바쳤다.

건축가 김중업 설계로 1959년 완공된 옛 대학본부 현관 캐노피(위쪽)와 캐노피 위 16m 십자가. 국립대학이라 부득이 상징으로 처리했다.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성소’다. 그 상징 십자가는 어디에 있을까. 옛 본관 캐노피 현관이다. 나선형 계단에 올라서 멀리 보지 말고 캐노피 지붕을 보라. 16m 십자가가 전율을 느끼게 할 것이다. 교육 목회를 통해 ‘진리와 자유’를 퍼뜨리고자 했던 부산대 설립자 윤인구 목사의 꿈이 담긴 십자가다. 보(褓)에 덮이면 비밀이고, 보가 걷히면 계시다.

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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