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등단 20년을 맞은 시인 김민정. 그가 최근 발표한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는 ‘곡두’라는 키워드로 죽음과 뒤엉켜 있는 삶에 대해 노래한 작품이다. 필자 제공

저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외치는 시대에 “나는 나의 부록”이라 말하는 이가 있다. 시인 김민정이 등단 20년에 맞춰 펴낸 네 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 한 고백이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인데, 만나는 사람들과 ‘책’ 혹은 ‘시’로 연결되어서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또한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어제는 ‘대구’였다가 오늘은 ‘부산’이더니 내일은 ‘제주’인 식의 일정으로 움직이는 일도 다반사여서, 그 길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동시에 다양한 일들을 겪기도 할 터. 아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TV 프로그램을 봐도, 그는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거기서 또 만난다. 그런데 그 만남들이 즐겁고 행복하기보다는 요지경일 때가 많다. 유독 시트콤에서처럼 에피소드가 많은 삶을 사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뭣 같은 경우를 재미나게 말하는 재주를 가진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SNS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말을 김민정에게 가져오면 ‘뭣 같은 경우’가 그에게 오면 시가 된다는 것, 이번 시집을 보며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러니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다. 사랑을 시로 쓰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지 않고, 이방인과 가족을 따로 두지 않는다. 이 편애 없는 사랑 속에 외따로 놓인 이는 단 하나. 시인 자신이다. 시인은 “막달 임산부의 배만 한 덩어리였다가 쪼가리로 버려지는 수박 껍질에서 사방팔방 꽃가루처럼 퍼지는 초파리들조차 제게 야유한다고 믿는”, “그것이 주제 파악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여름’(‘그니깐 여름이 부르지 마요’)이다. 스스로를 “돌아 까짐의 전문가”라고 하면서 “사물함에 두고 온 네모난 아베다 손거울”을 “누군가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마치 자신처럼) “테두리가 까졌”기(‘나의 까짐 덕분이랄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다. 그뿐인가. “트럭에 치여 죽은 앞집 아이”와 “간암으로 15년 전에 죽”은 그 아이의 아빠를 떠올리며, 자신과 상관없는 죽음에조차 “사는 일에 있어 닿고 닿는 그 미침에 내 모자람이 큰 듯하여 오늘도 나는 미치고 폴짝 뛰고나 있”다고(‘기적은 왜 기적을 울리지 않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가’) 자책하는 이다. 시인은 자신을 뺀 다른 이들을 편애하며, 그들을 편애 없이 부른다. 미주알이 빠져 찾아간 병원에서 ‘김태형’이란 이름의 의사를 만나자, 빠져버린 미주알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아는 ‘태형’이란 이름을 죄다 읊어대는 것처럼(‘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시집에 실린 44편의 시는 ‘곡두’라는 제목의 연작시이다. ‘곡두’는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뜻 외에 ‘꼭두각시’의 잘못된 말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의 시를 읽는 일이 꼭두각시극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라는 무대 위에 그가 호명하는 이들의 인형이 나와 장면 장면을 만들어내고 그 동작에 맞추어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전적 의미에서, ‘꼭두각시극’에 ‘곡두’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없는 ‘곡두’를 시인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곡두’가 되어서, 이미 사라진 이들을 ‘시’로 살아내고 있으니, 이만큼 곡진한 사랑 노래가 또 있을까.

시집의 뒤표지에서 시인은 “화두는 곡두/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고 적었다. 시의 화자와 시인을 구분하지 못한 이 지독한 오독의 끝에, 나는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해본다.

화두는 김민정. 그러나 언어는 김민정에게 사랑을 주었다.

<김필균·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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