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6·25 전쟁 속 실제적 구원 체험… 그분이 나를 이끄셨다”

[백세신앙] 하나님과 동행 98년 유동식 전 연세대 신학과 교수

유동식 전 연세대 신학과 교수가 지난달 23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 앞마당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신년 인터뷰를 위해 유동식(98) 전 연세대 신학과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100세를 눈앞에 둔 그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인근 2층 단독주택에 혼자 살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긴 했지만, 계단을 무리 없이 오르내렸고 요리도 직접 하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2시간 넘게 인터뷰하는 동안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고 보고 듣고 말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농담도 섞어가며 대화하는 걸 즐겼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더 나눠줄 지혜가 없다’며 고사했던 일이 무색했다. 유 교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성도의 건강한 교제를 즐기라”고 당부했다. 100년 신앙인이 말하는 제1의 장수 비결이었다.

1922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난 유 교수는 “8·15해방, 6·25전쟁을 겪으며 하나님 구원의 원체험을 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시절 학병으로 징집돼 전원 옥쇄를 준비하던 참호 속에서 도둑같이 해방을 맞았다. 6·25전쟁 때는 당시 약혼자였던 윤정은(1928~2004) 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를 찾기 위해 충남 공주에서 경기도 과천까지 사선을 뚫고 상경했던 낭만파였다. 미국 보스턴대 신학과에서 석사, 일본 도쿄대와 가쿠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감리교신학대에서 10년, 연세대 신학과에서 종교학 교수로 15년을 지낸 뒤 퇴임했다. 신학을 기반으로 유불선을 통달해 한국인의 종교와 예술 행위를 풍류도란 이름으로 정립했다.

반려자인 고 윤정은 이화여대 영문과 명예교수의 초상화.

인터뷰는 지난달 23일 자택 거실에서 진행했다. 유 교수는 평생 반려자인 아내 윤 교수의 사진이 마주 보이는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 “저게 저 친구 사진이야”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 교수는 2004년 작고한 뒤 시신을 연세대 의대에 연구용으로 기증해 비석 하나 남기지 않았다. 평생 써온 시집만이 유품으로 남아있다.

-혼자 사신 지 얼마나 된 겁니까.

“저 친구가 암 수술을 받은 게 2000년이고 200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5년이네. 아들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돌봐주고 대부분 시간은 혼자 지내지. 이 집은 80년대 건축학과 교수인 아들이 설계한 건데, 정남향이고 마당도 있고 따듯해.”

-연희전문 시절이 궁금합니다.

“왜정 때였는데, 윤동주 시인이 2년 선배였지. 나는 황해도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를 나왔어. 할아버지가 춘천중앙교회 장로셨고. 그땐 장손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조부의 사랑방에서 컸어. 전쟁 때여서 취직을 생각해 연희전문 이과를 선택했는데, 신학과 문학에 더 끌렸지. 결국 연희전문을 그만두고 일본 도쿄 도부신학교로 유학을 갔지.”

-학병은 어떻게 끌려가신 겁니까.

“유학 가서 공부한 지 1년도 안 돼 44년 1월 4일 징집됐어. 태평양전쟁 막바지니까.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 나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 있는 서부 제24부대에 배속됐어. 말과 마차로 물자를 수송하는 치중대(군수지원대)여서 당치도 않게 학병 가서 말 타는 법을 배웠지. 하하. 45년 5월엔 부대가 개편돼 규슈 남단 바닷가로 가게 됐어. 원래는 죽음의 섬인 남양군도로 가야 하는데 미군이 제해권을 장악해 배를 띄우지 못한 거야. 미군이 오키나와까지 점령했고 매일 미 해군 전투기가 기총소사 공격을 했어. 참호에 숨어있다가 미군 탱크가 오면 지뢰를 안고 뛰어들라는 지시를 받았어. 그러다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지.”

-조국으로는 어떻게 돌아오셨습니까.

“45년 10월 5일로 기억해. 부산항에 도착한 게. 그것도 요나의 일처럼. 후쿠오카에 고국으로 오려는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배를 구할 수 없었는데, 나를 포함해 학병과 징병 출신들 70명이 목선 한 대를 구했어. 나침반도 해도도 없이 밤에 별을 보고 운항하는 배인데, 이걸 타고 밤에 출발했어. 어찌나 풍랑이 심한지 다들 토하고 검은색 수평선밖에 안 보이는 거야. 나중엔 배의 엔진에 물이 들어가 고장 나서 말 그대로 이틀을 거친 풍랑 가운데 표류했어. 다 죽었구나 하는데 웬 시커먼 배가 다가오는 거야. 다들 웃통을 벗어 흔들며 살려달라 울부짖고. 나중에 보니 일본 상선인데 그 배도 기관이 고장 나 표류하다 가까스로 수리하고 지나가려다 우리 목선을 발견한 거야. 그 배에 끌려 들어간 곳이 대마도였어. 그때 발견 안 됐으면 태평양으로 흘러갈 뻔했지. 이런 경험으로 나는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했다고 봐. 우리 민족에겐 비극의 역사였지만 개인에겐 구원의 체험이었어.”

-6·25 땐 어땠습니까.

“해방 후 감리교신학대에 들어가 졸업했는데, 장로교는 신사참배로 싸우고 감리교는 친일문제로 싸우고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수라장이었어. 목사가 되는 대신 교사가 되기로 했지. 충남 공주여자사범학교에 공민과 선생으로 가 있는데 인민군이 남침한 거야. 나는 그때 이화여대에 다니던 저 친구와 약혼한 상태였거든. 안위가 너무 궁금한 거야. 남들은 남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북으로 올라갔지. 서울에서 유학 온 사범학교 학생 둘과 함께 낮에는 들에 숨고, 밤에는 산길로 걸어 과천까지 갔지. 인민군이 한강을 지키고 젊은 남자는 노무원으로 끌고 가던 상황이어서 여제자들이 시내에 들어가 처가가 피난 간 안양의 산골 집 주소를 가르쳐 줬어. 누더기 차림으로 재회했지.”

-망백의 나이에 이처럼 건강하신 비결이 궁금합니다.

“아침에 30분씩 방에서 기공체조를 해. 일종의 스트레칭이야. 여러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데 다들 건강할 때는 실천하지 않는 거 같아. 나는 체력이 강하지 않고 약한 편인데, 잔병치레는 없었어.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기공체조를 습관으로 만들었는데 큰 도움이 됐어. 식사 때 적포도주 한잔도 소화제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줬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덕담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건 교회에서 나누는 성도들과의 건강한 교제야. 평생 연세대 루스채플의 대학교회를 다녔는데 예배를 마치면 성도들과 곰탕집에 가서 국밥을 먹고 카페에서 잡담을 나눠. 설교에 대한 느낌, 교인들 소식 등을 나누며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거야. 이 즐거움을 새해에도 다들 꼭 이어갔으면 해.”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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